한참을 고민하다 막 투표를 하고 왔습니다. 국민의 신성하고도 소중한 권리인 한 표를 행사해야 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뽑을 者이 없을 때에는 적극적인 항거의 의미로 침묵하는 것도 저 나름으로는 권리 행사라고 믿고 있었기에 실은 이번에는 투표를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조용히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말을 꺼내더군요.
"투표하세요."
속된 말로 꽉 잡혀서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아내의 말이 떨어지면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이 현명하다는 걸 익히 알고 있기에 군소리도 하지 않고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습니다. 민주시민으로서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하긴 어려우나, 도랑치고 가재 잡고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심정으로 나왔습니다. 투표를 끝내고 집 앞에 있는 파스쿠찌에 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싶었거든요.
투표소에 들어섰습니다. 입구에 투표참관인이 세 명이나 앉아 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딱히 임무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도 나라의 혈세로 하루 고용한 것일 텐데, 굳이 세 명씩이나 필요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대구광역시에서 투표소가 한 군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동네마다 있는 투표소에 이렇게 남아도는 인력을 고용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원래 푼돈을 우습게 보면 그 집이나 나라는 발전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번호를 확인하는 사람이 한 명 있고, 투표용지를 나눠주는 사람도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둘 중 한 사람은 그냥 앞만 쳐다보고 있더군요. 만약 개인이 돈을 주고 고용한 것이라고 해도 이처럼 불필요한 인원을 과다하게 고용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투표용지를 받아서 기표소로 들어갑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입주민들만 오는 투표장이라 그런지 전반적으로 한산합니다. 물론 입주자 중 모든 유권자들이 투표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쨌거나 왔으니 투표는 하고 나가야 합니다. 또다시 저는 야채를 고르는 사람의 심정이 되어 누굴 고를까를 고심합니다. 야채는 그렇더군요. 오히려 겉이 깨끗한 것보다는 흙도 묻고 울퉁불퉁하게 생긴 게 더 싱싱하거나 다 맛있는 경우가 많더군요. 문득 사람도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제가 보기엔 흙이 안 묻은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과연 누구에게 묻은 흙이 우리에게 더 해를 끼칠까를 판단해야 하는데, 몇 번이나 말하지만 그런 안목은 저에게 없습니다.
국회의원 후보 중 한 명을 뽑았습니다. 결국은 빨간색, 아니면 파란색이더군요. 사람이 그렇게도 없나 싶기도 하고, 어차피 다른 색깔들은 나와봤자 안 된다는 체념론이 강하게 작용한 탓이 아니겠나 싶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비례대표 기표 용지를 펼치다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요, 이건 놀랐다기보다는 불쾌했다는 표현이 더 맞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정당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아래로 길게 늘어뜨러진 종이를 보면서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무슨 놈의 당이 이렇게 많아?'
기표를 했으면 얼른 밖으로 나와야 하겠지만,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없어 내친김에 종이에 표시된 정당의 개수를 세어봤습니다. 37개더군요. 이렇게 많은 정당들, 무슨 의미일까요? 이렇게도 많은 정당이 있는데도 우리의 삶은 왜 늘 팍팍하고 단 한 걸음의 진전도 없을까요?
아무튼 무탈하게 투표를 하고 나오니 정치에 대한 없던 관심이 갑자기 솟아난 것 같습니다. 단 한 번도 그 기대를 충족시킨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제발 누가 되든 나라와 국민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이 당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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