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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Jul 13. 2023

지식소매상

일곱 번째 글: 당신, 상당히 오래가는데?

인문학은 문사철이라고 해서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지칭하는 말이다. 역사와 철학을 두고 인문학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되지만 문학도 당당히 그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조금은 색다른 느낌이다. 물론 이 문학 속에 장르문학은 들어가지 않을 테다. 어쨌거나 우리가 흔히 읽는 시나 소설도 인문학에 포함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인문학에 보다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런 인문학을 직접 접하기보다는 먼저 접해봤다고 하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인문학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도 사실 무시하긴 힘들다. 토마스 불핀치의 저작을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비효율적으로 느껴진다. 그러기엔 내용의 난이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무엇보다도 그럴 시간이 없다(고 사람들은 늘 말한다). 그 대신에 먼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은 사람의 인문학 교양(안내) 서적을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처음으로 만난다. 사실상 이들의 목적은 그 신화 자체나 신화에 대한 현대적 해석 및 적용에 있는 게 아니라, 대화의 소재로 쓸 만한 정도의 단편적인 지식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굳이 머리 아프게 원전 혹은 원전에 가장 가까운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때 먼저 접해봤다고 하는 그들을 통칭하여 인문학 전도사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의 공통점은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것이다. 왜 여기에서 굳이 '현혹'이라는 표현을 써야 할까? 그건 그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 제대로 형성된 지식이나 생각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중의 일부는 실제로 그 분야에 깊이 몰입해 봤거나 나름의 연구와 고심의 흔적을 담아 책으로 펴내기도 하겠지만, 장담컨대 이 전도사들은 인문학을 읽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넘쳐나는 정보들을 잘 선별하고 짜깁기의 신공만 발휘한다면 안내서 정도는 쉽게 펴낼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렇게 간단한 것을 그러는 넌 왜 못 하느냐고. 그런 점에서 이런 인문학 전도사의 그 역량 하나만큼은 높이 살 만하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은 척척 해내니까 말이다.


보통 전도사라고 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고 포교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하지만, 인문학 전도사들의 목적은 인문학 자체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목적은 물으나마나일 것이다. 이들을 모두 싸잡아 시대가 불러온 사기꾼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을 테다. 분명 지금의 이 시대는 그런 그들의 역할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도 인문학, 인문학 하니 뭘 어떻게 해서든 인문학은 읽어야겠는데, 막상 그럴 역량도 시간도 없는 현대인들이 다가가기엔 상당히 힘에 부친다. 이럴 때 슬쩍 나만 따라와,라고 말해줄 수 있는 누군가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들만 만나면, 그들의 말만 듣는다면, 그들의 책만 읽는다면 우린 쉽게 인문학 한 편을 혹은 한 위대한 사상가의 엑기스를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시대의 변화가 불러온 비극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진정으로 인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싶으면 이들을 철저히 멀리 해야 한다. 그 말은 아예 접근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본격적으로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다면 원 저자가 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읽었다고 하는 철학의 세계를 우린 직접 접근하지 않고 그들을 통해 철학을 접한다. 그들이 먼저 읽었다고 하며 펴낸 책에서 우린 고대의 역사 문헌을 접한다. 이게 무슨 문제겠냐고 할 테지만, 만약 그들이 잘못된 가치 체계와 신념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외국여행을 못 가본 사람이 이미 갔다 온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 정보를 활용하는 것은 이해가 가나, 자기가 읽지도 않은 유명한 철학자들의 저작을 마치 읽은 듯 과장 광고하고, 우린 별다른 비판 없이 그들의 책을 통해 그 철학자의 생각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또 발생한다. 이렇게 받아들이게 되는 철학자들의 생각이 그들의 생각 그 자체가 아니라 마치 시험 족보에서나 볼 법한 단편적인 지식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굳이 이런 식의 낱낱의 지식이 필요하다면 우리가 굳이 인문학이라는 체계에 접근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 사상의 체계와 그 체계를 고찰한 생각의 틀이 필요한 것이다.


몇 년 전 현재까지 정본으로 알려진 플라톤의 대화편 26편을 제법 깊이 정독한 적이 있었다. 무려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물론 내가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낮에는 직장생활을 해야 하니 그만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게 한 번 읽어서 어딜 가서 아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어려운 내용들을 최소 수백 권에서 최대 수천 권을 읽었다고 하나의 생각의 틀을 만들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묻고 싶다. 정말 그게 가능한 것일까? 그러면서 어떻게 인문학을 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연차별로 읽을 만한 책들의 목록까지 제시할 수 있을까?


당시에 꽤 이름 있는 인문학 전도사들 중에서 딱 세 사람을 거론하여 친구에게, 그들이 수상하다고 언젠가는 톡톡히 망신을 당하게 될 거라고 했더니, 친구가 내게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세 사람 중 둘은 이미 공개적으로 민낯이 알려지면서 자숙에 들어갔던 전력이 있다. 비우기와 내려놓기를 몸소 실천하는 이 시대의 참된 종교인으로 행세(사실은 그가 행세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떠받들었다고 보는 게 더 옳겠다)하다 실상이 알려져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사람이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역사적 지식을 마치 역사의 전부인 양 떠들어대다 한 방 먹고 말았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나머지 한 사람은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내가 이들 세 사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되었을 때 그 바탕이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판단한 게 바로 이 사람이었다. 최근 그의 행적을 보니 정치판까지 기웃거리는 것 같아 그의 본질이 드러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전도사의 본연의 임무는 전도와 포교이다. 그렇다면 인문학 전도사의 본업은 무엇일까? 인문학의 전도와 포교일까? 당연히 아닐 테다. 그들에게 인문학은 본질이나 목적이 아니다. 본연의 임무는 따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젠 그들을 이렇게 불러도 될 것 같다.

지식소매상.


어차피 책을 좋아한다면 그들이 읽었다(사실인지 아닌지는 본인만 알 뿐)고 말하며 이를 바탕으로 펴낸 책을 통해 플라톤을, 아리스토텔레스를, 칸트를 이해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조금은 더 오래 걸리더라도 그 원전을 찾아서 읽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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