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작이 Jul 12. 2023

밤을 건너다

여섯 번째 글: 이렇게 또 한 번의 밤을 건너 내일로 간다.

밤은 누군가에게는 극도의 예민함과 나약함을 안겨 주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낮에 볼 수 없었던 강인함을 선사했다.

전자는 원시 시대 때부터 발현되어 온 생존본능에 기인한 것이리라. 야행성인 맹수들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낮 동안 풀어두었던 온갖 감각을 일깨워야 했다. 제아무리 강한 척해도 그들 앞에선 한낱 나약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인간은, 낮은 낮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고, 밤은 밤대로 죽지 않기 위해 두 눈과 두 귀를 열어둬야 했다.


후자는 밤이 주는 죽음에 대한 위협이 사라진 지금,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새로이 시작된 생존 본능에 기인한 것이다. 낮에 고스란히 눌러두었던 악의 인자들이 밤이 도래함과 동시에 서서히 깨어난다. 밤이 짙어질수록 이 악은 더 크고 더 대담해진다. 우리는 맹수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지 않아도 되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노리는 누군가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감각 기관을 열어야 했다.

유기견이 주변에 널려 있어도 모든 개가 미친 게 아니듯 우리 주변의 모든 이들이 어두움 속에서 우릴 노리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어쩌면 모두가 안식처로 돌아가 편히 심신을 달래는 그 순간마저도 위협을 떨쳐버릴 수 없다.

누군가가 악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사실 그렇게 되어야 할 당위성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다만 하필 그 누군가가 그때 그곳에 있었던 게 패착인 것이다. 우린 그런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우연의 일치가 내게서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며 오늘도 이렇게 이 밤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어릴 때부터 밤을 무던히도 싫어했다. 환한 대낮의 기운이 사그라들고 주위가 어둑해질 무렵이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말의 불안함은 어렸던 내겐 하나의 공포였다. 어린아이들에겐 그런 느낌이라는 게 있다. 어른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아이들의 시야에서 빚어지는 일종의 환시 같은 것 말이다. 일평생 어른은 볼 수 없었던 그 많은 귀신을 아이들이 봤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치일 것이다.


낮 시간 동안 특별히 뭔가를 잘못해서 온 가족이 다 모이는 그 시간대가 두려웠던 건 아니었다. 눈을 크게 뜨면 뜰수록 또렷이 보이지 않는 주변 사물이 품고 있던 그 흐릿한 정체감이 싫었다. 어딜 가나 정적뿐인 주변에 웅크리고 있을 듯한 극도의 어두움도 그러했다. 어쩌면 그도 그럴 것이 덩그러니 나 홀로 있던 집에서 형제자매라고는 없이 유년기와 소년기를 거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환시를, 때로는 나에게만 들리는 것 같던 환청을 함께 이겨낼 누군가가 내 옆에 없었다는 건, 아무리 부모와 함께 살아간다고 해도 그 어떤 대체제로도 보상이 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래서일까, 사회성은 극도로 미발달했고, 함께 극복해야 할 근원 모를 어떤 것에 대한 미지의 막연한 불안감 등이 자라오는 내내 나를 지배했던 것 모양이었다.


그러던 내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늘 내게 절망과 불안을 안겨 주었던 그 밤의 공포에서 어느새 벗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 쌓여가는 업무에서 놓여나 조용히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자잘하게 신경이 쓰이던 다양한 인간 군상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들 수 있는 저녁 시간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깊어져 가는 그 밤이 조금씩은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밤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동안 난 내 하루를, 그리고 전반적인 내 삶의 모습을 돌아볼 틈이 생겼다. 비록 밤에 한 다짐이 반드시 다음 날까지 이어져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고 해도, 그래도 내게 주어진 밤이라는 이 고즈넉한 시간은 충분한 가치를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 끝은 잠시 후 또 다른 시작을 불러들이는 법이다. 이 새로운 시작은 지난밤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결정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저 그렇게 흘려보낸 하루를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다가올 다음 하루를 어떻게 맞아들일 준비를 하느냐에 따라 내일이라는 하루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럴 때면 책상 위에 올려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테다. 가족이 러앉아 술잔을 기울여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이 길고 긴 밤을 홀로 있기보단 함께 하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할 테니까.

오늘도 그렇게 어제 내게 주어졌던 하나의 밤을 보낸 후 새 하루를 맞이했고, 그 하루가 지나 다시 한번 밤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지금, 나른함과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게 젖어드는 이 느낌이 더없이 좋다. 아마 앞으로도 밤은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난한 호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