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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Jul 12. 2023

가난한 호사

0395

부족하다 부족하다 하여도 내가 누리는 은밀하고 분에 넘치는 사치들은 무수히 많은데 굳이 시간 내어 일일이 손꼽으며 헤아려보자면 이러하다.


첫째, 거동의 호사다.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곳까지 아무의 도움 없이 갈 수 있다는 신체적 능력과 기꺼이 누구의 동행 없이 가고 싶다는 심리적 의지가 여전하다는 것은 호사다.

걷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다는 건 최근 급격히 떨어진 체력에서 깨달았고 이동하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몇 해 전 긴 우울이 지난 후 느꼈다.

홀로 이동하면서 인간은 새로워지고 성장한다.

짧게는 산책, 길게는 여행으로 반추하고 반영한다.

목적을 가지지 않는 거동에서 인간은 생기 돋는다.

그것을 할 수 있고 그것을 하고 싶은 건 분명 호사다.


둘째, 심심함을 누리는 호사다.

심심하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노력해야 심심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심심함을 교묘하게 착취하면서 덩치를 키운다.

현대인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의 심심함을 쓸모없다 여기고 헐값으로 처분하고자 한다.

심심함은 겉으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듯 보이나 사실 제대로 보자면 審深, 자신으로 천착해 살피고 깊어지는 시간이다.

이 창의적인 기회를 수시로 누리는 건 분명 호사다.


셋째, 새벽을 누리는 호사다.

새벽을 점령하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하다.

저녁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일찍 자는 것이다.

알람의 도움 없이 바이오리듬은 오전 4시가 되면 저절로 눈을 열어준다.

신체에서 눈이 문이다.

가까스로 나온 빛에 기댄 새벽이 나를 반긴다.

하루 중 새벽은 진액 같아서 한 번 맛 들이면 묽디묽은 낮시간과 멀건 2% 음료 같은 밤시간이 시시해진다.

새벽은 그 자체가 강렬해서 물을 마셔도 취한다.

한 시간만 독서해도 낮보다 다섯 배 효과가 있으며

십 분만 글을 써도 우주를 다녀온 깊이를 실감한다.

이런 호사를 매일 가질 수 있는 행운은 혼자만 알고 싶을 정도다.


이외에도 나의 가난한 사치들은 즐비하다.

너무 다행스러운 점은 아무도 탐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중에서

물질이 사치가 될 수 없음은 가져본 후 곧바로 증명된다.

이것으로도 충분치않다는 탐욕이 누추함으로 이끈다.

진정한 호사는 인간을 외형이 아닌 내면을 초라하게 만들지 않는다.


앞으로도 나는 가난하게 호사를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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