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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May 07. 2024

글을 쓸 때 저는 이렇게 합니다.

글을 쓸 때 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간혹 사람들로부터 안하무인 격의 태도를 가진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뭐, 그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만 보다가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정작 못 쓴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테니까요. 일단 생각한 것은 죄다 밖으로 게워내야 합니다. 때로는 논리를 덜 갖추었다고 해도 우선은 내놓고 야 어떤 것들을 다듬을지 결정이 되니까요. 그냥 속에만 가둬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집에 금송아지 하나쯤 없는 집이 어디 있을까요?


특히 연세가 많으신 분들 중에서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길을 글로 풀어낸다면 장편소설 몇 권 정도는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 번이라도 그들이 말한 그런 장편소설을 구경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없을 겁니다. 생각만 한다면, 좋은 작품의 거리가 됩네 하면서 관념 속에만 가둬둔다면 그건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뿐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큰마음먹고 꿰기 위해 내놓은 제 글 나부랭이가 보배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저도 그 정도의 보는 눈은 있으니까요. 막상 꿰어보니 그게 보물이었든 쓰레기였든 일단은 꿰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구 흩어진 저의 글들을 이리 꿰고 저리 뀁니다. 보배라면 더없이 좋을 테지만, 지금 당장은 쓰레기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저처럼 꿸 것이 있는 것과 없는 건 분명 차이가 있으니까요.


또, 글을 쓸 때 저는 문장의 꼴을 갖출 만한 것이면 뭐든지 써놓고 봅니다. A4 한 장 짜리 글이라도 좋고 그 이상이 되어도 무방합니다. 꼭 얼마만큼의 분량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았을 때, 혹은 지금처럼 스마트폰을 펼쳐 들었을 때, 마치 저는 제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빠지곤 합니다. '지금부터 내 얘기를 들려줄 테니 잘 들어봐'라는 식으로 단어와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만듭니다. 그렇게 만든 문장에 질서감을 부여하기 위해 이리 끼워 넣었다가 저리 끼워넣었다가를 반복합니다. 혹시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라도 없나 싶어 제 앞에 앉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누군가에게 들려줄 듯이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합니다.


단어를 조합할 때, 문장을 다듬을 때, 그런 과정을 거치며 글을 쓸 때 저는 일종의 작은 마법사가 됩니다. 아무것도 없던 무에서 유가 창조되고, 의미 없던 낱말들이 모여 주제를 형성합니다.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는데 뭔가가 뚝딱, 하며 만들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제가 부리는 마법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연금술을 부린다거나 있던 것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보일 순 없어도, 어지럽던 낱말들과 문장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기어이 한 편의 글을 만드는 데에는 누구 못지않게 자신이 있습니다.


저는 제 글을 사랑합니다. 설령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제 글을 두고 손가락질하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전 누구보다도 제 글을 사랑할 것입니다. 만약 집에 불이 났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널름대는 화마를 무릅쓰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을 가져오기 위해 불로 뛰어들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동안 제가 쓴 천 편이 넘는 글이 불타고 있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뛰어들어야 할 이유는 충분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보기에 저는 글을 참 쉽게 쓰는 것 같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쉽다'는 말은 내용이 쉽다는 게 아니라, 함부로 혹은 막 쓴다는 뜻에서의 '쉽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20분이면 뚝딱, 30분이면 뚝딱, 하며 글을 써내고 있으니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것 만큼은 확실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어떤 한 편의 글도 저는 마구잡이로 혹은 함부로 쓰지는 않았다고 말입니다. 누구나가 그렇듯 저 역시 글을 쓸 때면 평소에는 만날 수 없던 제 자신을 만납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봉인이 해제된 저의 참모습이겠지요. 그 '참 나'가 말하고 원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 저의 글이니 어찌 함부로 썼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검열관이라는 이 반갑지 않은 녀석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합니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이들도 반드시 거론하는 게 바로 이 검열관이라는 놈입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자면, 보다 더 나은 글을 쓰는 데 있어 어느 정도는 일조한 게 사실이나, 이 녀석은 걸핏하면 수면 밖으로 나와 우리가 글을 쓰지 못하게 합니다. 겨우 그 정도의 실력으로 글을 발행하면 사람들한테 욕먹을 거라며 엄포를 놓아,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가 글을 발행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때 그 녀석의 유혹에 굴복해 '작가의 서랍'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글이 몇 편이나 될까요? 그래서 우린 그놈의 검열관의 농간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녀석은 툭하면 말합니다. 그 따위로 글을 쓸 거면 집어치우라고 말합니다. 지극히 사적인 생각입니다만, 녀석에게 굴복해서 애써 쓴 글을 묵혀 두는 것보다는 그 따위 글이라도 써서 발행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여기에서 이 녀석을 물리칠 수 있는 비책 하나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바로 쓴 글은 무조건 발행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공간에서 발행할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고나 할까요? 어떤 글이든 써서 발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습관이 되면 이 검열관이라는 녀석도 더는 우리 옆에서 속삭이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게 됩니다. 말해 봤자 들은 척도 안 하니까요. 참고로 제 '작가의 서랍' 속에는 단 한 편의 글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약간은 더 거만하거나 혹은 다소 재수 없이 이 글을 마무리해 볼까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혹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의 논리를 글쓰기에 갖다 대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우리 주변에 글을 우리보다(단적으로 말해서 저보다) 훨씬 잘 쓰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지만, 그들은 그들이고 저는 저입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건 말건 간에 우리가 쓴 글에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일이야 없을 테지만, 한창 잘 나가는 한 소설가가 초고를 들고 와 저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제가 쓴 소설의 초고와 자신의 것을 바꾸자고 말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당연히 저는 절대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작품성이 뛰어나고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을 만큼 주옥같은 작품이라고 해도 그건 그의 작품이지 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엉성한 글이어도 그의 글과 비교했을 때 발가락에 낀 때만큼의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고 해도, 지금 제가 쓰고 있는 글은, 또 서로 다른 장소에서 골머리를 앓아가며 혹은 쥐어짜 내며 쓴 여러분의 글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글입니다. 만약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 정도의 자부심이라도 없다면, 이 골치 아프고 힘겨운 중노동을 우리가 애써 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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