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얼 쓸까요?
삼백 스물여덟 번째 글: 흰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자.
사진 속의 모습처럼 백지가 저를 보고 대뜸 묻습니다. 뭘 쓸 거냐고 말입니다. 종이를 외면하고 스마트폰을 펼쳐 들었더니 이 녀석도 같은 질문을 해댑니다. 뭐라고 대답하긴 해야겠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통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굳이 대답이 필요하겠나 싶어 글을 쓰려는데 이번엔 손이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6시 14분발 대구행 무궁화 연차를 타고 가는 중입니다. 관광객도 있겠지만, 귀가 중인 사람들이 대부분인 무궁화 열차, 그 가운데에도 단연 직장 통근자가 많습니다. 그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열차카페칸 바닥에 앉아 글을 쓰다 문득 창밖을 내다봅니다. 아직 채 절반도 못 왔습니다. 물론 굳이 어디쯤 왔는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든 건 아닙니다. 무려 12년을 매일같이 왕복하는 길이다 보니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어디쯤 가고 있는지 훤히 알 정도가 되었습니다.
일반 지하철 내의 좌석 배치와 같은 무궁화호의 열차카페칸은 14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좌석이 서로 마주 보고 있고, 두 명씩 앉을 수 있는 미니 좌석이 다섯 세트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외의 나머지는 모두 빈 공간입니다. 즉 24명 정도는 앉아서 가고, 남은 사람은 모두 서서 갑니다. 서 있는 사람 중에 저처럼 편한 바지를 입은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아 가기도 하고요. 때로는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 공식은 깨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체로 나이가 든 사람들은 눈을 감고 있습니다. 아마도 딱히 할 만한 거리를 못 찾았나 봅니다. 아직 50대쯤이 안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간혹 게임하는 소리도 들리고, 이어폰 너머로 음악 소리도 들리지만, 전반적인 이 정적을 깨뜨릴 정도는 아닙니다. 사실 남들이야 뭘 하건 말건 가타부타할 계제도 못 됩니다. 이러는 저도 폰을 보고 있으니까요.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주변 사람들 의식하지 않고 시끄럽게 통화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종종 그런 사람들이 탑승하면 그 짧은 20분이라는 시간도 고달파집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곧이 듣지 않긴 합니다만, 어지간해서는 요즘과 같은 세상에 뭐라고 하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열차 안이 조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정도의 소음이라면 뭘 해도 집중할 수 있을 듯합니다. 늘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히 글을 쓰고 있으니 생각도 정리되고, 신산했던 마음도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뭘 쓸까, 하며 염려했더니 그러는 와중에 벌써 한 편의 글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글이냐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안 쓰는 것보다는 이런 두서없는 글이라도 쓰는 게 낫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막상 쓸 게 없을 때에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쓰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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