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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May 13. 2024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지금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바닐라 라떼 한 잔을 마시는 중입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평소보다 버스가 10분은 더 늦게 온다며 버스 도착 안내판에 떴습니다. 족히 20분은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결과 커피 한 잔 마시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커피 매장은 적진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적진'이라는 표현이 이상하지요? 쉽게 말해서 학부모와 아이들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길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라면 거저 마시게 해 준다고 해도 싫을 상황일 터입니다.


제가 굳이 이곳을 오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저희 학교는 대로변을 기준으로 서로 마주 보고 학교와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학교 쪽으로는 그 흔한 가게 하나 없는 곳입니다. 공교롭게도 편의점부터 여섯 군데 정도 되는 커피 매장까지 죄다 아파트 단지 주변에 포진해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커피 한 잔도 결국은 대로를 건너와 아파트 단지까지 와야 마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 대놓고 적진의 한가운데에 간다는 표현을 하곤 합니다. 그만큼 껄끄럽다는 뜻입니다. 사실 처음엔 지금처럼 이리 편하게 올 수 없었습니다. 조금 심하게 과장하자면 지나치는 사람들은 저는 몰라도, 그들은 어지간해서는 제가 누군지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 결과 이젠 아무렇지 않은 듯 이곳을 활보하고 다닙니다.


종종 이렇게 이곳에 와 바닐라 라떼를 마시고 있으면, 하루를 마무리하는 데 있어서 이만큼 근사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글도 한 편 쓸 수 있고, 정신없이 보낸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도 가져보게 되니까요.


가끔씩 얼굴을 들어보면 매장 유리창에 바짝 붙어 인사하곤 하는 아이들을 보기도 하고, 학부모가 느닷없이 매장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나눠야 할 때도 있긴 하지만, 홀로 나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이 느낌이 나쁘지 않습니다.


제게 주어진 이 한 시간의 자유를 만끽하려 합니다. 오늘 하루를 무탈하게 잘 보냈으니 이 정도의 작은 보상은 저에게 줘도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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