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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Jun 29. 2024

155일 차.

바삐 내딛는 발걸음 앞에 정체불명의 물방울이 툭, 하며 떨어집니다. 설마 싶었는데 한참 전부터 땅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올 법한 매캐한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습니다. 이 텁텁한 흙냄새를 몰고 오는 건 그 녀석밖에 없습니다.


등에 맨 백팩 오른쪽 옆주머니에 접이식 우산이 버젓이 꽂혀 있지만, 꺼냈다가 다시 접을 생각을 하니 귀찮아집니다. 지하철 역까지 남은 거리를 계산해 봅니다. 대략 120m쯤 남은 것 같습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사람들 위로 신호등 불이

바뀌고 있습니다. 다음과 그다음 신호가 차례로 들어와야 길을 건너갈 수 있습니다.


아직 후드득, 하는 정도는 아니라 다행입니다. 여전히 우산을 꺼내지 않은 채로 버틸 만합니다. 이러다 거짓말처럼 쏟아 내리기 시작한다면 그땐 방법이 없습니다. 지하철 역사를 10m 이상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산을 펼쳐 들어야 합니다.

"어이! 거 웬만하면 1분만 참지!"

녀석이 들을 수만 있다면 꼭 그렇게라도 말하고 싶은 기분입니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다 보니 벌써 남은 거리의 절반을 지나쳤습니다.


작은 교차로에서 차량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잠시 멈춥니다. 어차피 바로 지나갈 순 없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아직은 빗방울이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 안으로 뛰어들 때까지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을 펼쳐 몇 글자 처넣고 있으려니 앞을 가로막고 있던 다섯 대의 차량이 빠져나갑니다. 이제 남은 거리는 60m쯤, 차들이 드나드는 코앞에 있는 주유소 하나만 지나면 이제 제 발걸음을 막을 일은 없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유를 끝낸 두 대의 차가 연이어 인도변 턱에 타이어를 올립니다. 뒤로 가려니 몇 미터나 돌아가야 하고, 앞으로 가자니 바로 차도라 기다리기로 합니다. 일단 단념하고 몇 글자 더 치고 있는데, 갑자기 두어 글자가 흐릿해 보입니다. 스마트폰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 겁니다. 손바닥을 들어 화면을 쓸어냅니다. 그러더니 이내 오른쪽 팔등에 떨어집니다. 이번엔 두 방울입니다.


고개를 들어 남은 거리를 확인합니다. 뛰어가면 고작 5초 정도 걸릴까 말까 한 거리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뛰지 않는다가 행동 철칙이 되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꼭 어떤 체면 때문만은 아닙니다. 솔직히 이젠 뛸 수 없습니다. 마음 잡고 뛰어본 게 언제였던가 싶습니다. 그래도 뛸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남은 거리는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이번엔 머리 위에도 몇 방울 떨어집니다.


드디어 지하철 역사 안으로 발을 들입니다. 이 길로 내려가면 50여 분은 지하에서 움직여야 지상으로 나갑니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딱 50분 동안만 비가 오고 제가 지상으로 올라갈 때쯤엔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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