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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Jun 30. 2024

제목을 입력하세요.

156일 차.

지금 한 줄의 문장을 보고 한창 노려보고 있는 중입니다. 글을 쓸 때마다 만나는 녀석이긴 합니다. 이제 어지간하면 적응이 될 법도 한데, 복잡한 머릿속과는 별개로 한동안 그 녀석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제목을 입력하세요


녀석은 마치 제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글을 쓴다는 사람이 제목도 안 처넣고 무슨 글을 쓰냐고 말입니다. 저는 그러면 녀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목이 없는데 무슨 수로 적어 넣느냐고 말입니다. 녀석은 제게 제목이 없으니 그러면 글을 쓰지 않을 거냐고 묻습니다. 그럴 리가 있을 리 없지요. 제목이 없어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전 녀석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한 자 한 자 글을 써나갑니다. 시종일관 녀석은 제게 제목 없이 글을 쓰는 건 경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썼다고 해서 그게 무슨 글이 되겠느냐는 날카로운 지적질까지 합니다. 그러건 말건 간에 저는, 마치 제목이 없어도 글을 쓸 수 있다는 듯 들은 척 만 척 글을 써나갑니다.


제목을 입력하세요.


무언의 압력이 꽤 강했나 봅니다. 그래 좋다, 하며 기어이 내친김에 제목을 처넣습니다. 이젠 녀석에게 저도 큰 소리를 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제목을 입력했으니 잔소리할 생각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참, 저도 엉뚱하긴 엉뚱합니다. 기껏 생각해서 쳐 넣은 제목이 '제목을 입력하세요'라니 말입니다. 제목을 이렇게 입력해 놓고 나니까 좋은 점은 하나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내용의 글을 써도 무방할 것 같긴 합니다. 게다가 어쨌든 제목을 입력했으니 더는 녀석도 제 앞을 알짱거리지 않을 겁니다.


사실 글의 제목이라는 것은 글을 쓸 때 최소한의 방향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운 망망대해에 한 척의 배가 표류하지 않고 목적지로 갈 수 있는 건 밤하늘을 밝히는 등대의 역할 때문이듯, 글의 제목은 글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의 글은 방향키를 잃어버린 채 마구 떠돌고 있는 셈입니다. 저에게는 나침반도 없고 저를 목적지로 데려다줄 등대의 불빛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어쨌건 간에 몇 분 후면 목적지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글에 있어서 최종 목적지는 무엇일까요? 그건 분명 사람마다 다른 것이겠습니다만, 제게 있어서의 목적지는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게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고 말입니다. 읽을거리도 없는 글을, 어딘가 한 군데라도 특이한 점이 없는 글을 굳이 써서 뭐 할 거냐고 말입니다. 저는 그러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글이라는 건 쓰지 않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표현과 문장이라도 마음에만 혹은 머릿속에만 품은 채 밖으로 꺼내놓지 않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집집마다 금송아지는 다들 하나씩 있는 법입니다. 그 금송아지를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건 있으나 마나 한 것입니다. 그저 관상용으로서의 금송아지는 우리에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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