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어로 '멈춤' 또는 '보류'를 의미하는 에포케(epoché)는 다양한 철학적 입장 중에서 회의론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회의론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은 감각에 의존하는데, 감각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피론을 필두로 한 고대의 회의론자들은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판단을 보류하라고 합니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판단해 봤자 모든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주장도 확실하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 결과 고대 회의론자들은 (다른 철학자들이야 어떻건 간에) 모든 판단을 보류하고, 평온하고 무관심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왔다고 합니다.
난데없이 철학 이야기를 꺼내어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이 '에포케'라는 개념을 끌어오는 이유는 제가 글을 쓸 때 명백히 이 입장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결과부터 말하자면 저는 고대 회의론자들의 생각이나 사상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들 못지않게 최소한 글쓰기에 있어서만큼은 모든 판단을 보류하고, 평온하고 무관심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괜히 이 사진을 캡처한 것이 아닙니다. 일단 먼저 확인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대략 1년 1개월 동안 1464편의 글을 썼습니다. 네, 맞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어마어마한 숫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이만큼 많이 썼으니 저 잘한 것 맞느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많은 글을 써오는 동안 저 역시 글에 대해 참 많은 고민과 회의감에 젖어왔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과정을 크게 두 시기로 나눠 볼까 합니다.
뭣도 모르고 신나게 글을 쓰던 시기였습니다. 브런치스토리라는 새로운 세상에 입성한 데다 이제는 어엿이 언제든 어디에서든 글을 써서 저장할 수 있다는 저만의 방이 생겼다는 근원 없는 자부심과 긍지에 불타 앞도 뒤도 안 보고 글을 쓰던 시기였습니다. 지금도 매일 적지 않은 글을 쓰곤 합니다만, 솔직히 이 시기에 가장 많이 쓴 날은 9편까지 쓴 날도 있을 정도입니다. 많이 쓴 걸 자랑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만큼 제게는 글을 쓰겠다는 것 외엔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계속 이딴 식으로 글을 써야 하는 자괴감도 들었고, 고작 이 정도의 수준의 글을 글이라고 계속 발행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즈음부터 저 또한 구독자의 수도 신경이 쓰였고, 기껏 제가 써서 올린 글이 과연 얼마나 많은 작가님들이 '라이킷'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곤 했습니다. 심지어 별 내용이 없는 것이라고 해도 어떤 작가님께서 댓글을 달아주면 그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것도 아닌 눈에 보이는 지표에 은근히 속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자주 그런 생각에 빠져 들었습니다. 왜 단 한 번도 메인 페이지에 필명이 언급되거나 제 글이 소개된 적이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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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7개의 분야에서 저는 단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건 지금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겠습니다만, 그래도 그때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 제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해도, 저 나름으로는 글을 이만큼이나 썼으면 한 번쯤은 제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느냐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아마 그렇게 한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전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계속 글을 쓸 것인지, 아니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아마도 제가 제일 잘한 것은, 쉬지 않고 글을 썼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건 간에 지속적으로 글을 쓰면서도 회의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한창 겨울방학 중이던 1월의 어느 날 제게 실낱같은 희망 하나가 날아들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엉뚱하게도 철학서에서 읽었던 바로 그 판단 중지, 즉 에포케(epoché)였습니다. 계속 이렇게 회의감에 젖어 있으면 앞으로 더는 글을 쓸 수 없겠구나, 그러면 앞으로 그 어떤 판단이라도 일단 보류해 보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글이라는 게 책임감 있게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적어놓고는 판단을 보류하겠다고 한다면 일종의 책임 회피로 보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도달한 생각의 결론은 설령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이마저도 판단을 중지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판단을 중지, 혹은 보류한 뒤에는 반드시 또 다른 판단이 따르게 됩니다. 물론 이 판단은 전적으로 저에게 유리한 판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 한 줄의 글을 써도 막상 써야 하는 사람은 저이기 때문이겠습니다.
물으나 마나입니다. 저는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언젠가 한 작가님의 글에서, 이곳 브런치스토리에 작가로 등록된 분이 총 54,000명이란 부분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전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자주 합니다. 만약 글을 점수화해서 줄을 세운다면, 저는 아마도 53,000번째에서 54,000번째쯤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 글에 대한 전적인 판단을 중지하기로 한 이후로는 누가 저에게 제 글이 별로라고 해도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제가 이렇게 대놓고 인정해도 마찬가지로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하려 합니다. 저는 글쓰기라는 세계에서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고 말입니다.
키가 1m를 갓 넘긴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넌 왜 이렇게 작냐는 말을 하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는 아직 10년 이상의 긴 기간 동안 키가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편의상 제 글은 초등학교 1학년 글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10년 정도 더 쓴다면 그때 가서 제대로 판단해 볼까 합니다. 아마도 그 판단의 결과는 다음의 두 가지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역시 나는 글쓰기에는 소질이 없어.
음, 10년 동안 쓰니 나도 글쓰기에 제법 소질이 보이네.
글쓰기에 있어서만큼은 모든 판단을 중지, 보류한 저 역시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좋을까 하는 생각은 아직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기엔 아직 제가 그럴 만한 깜냥이 안 됩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하는 게 상식입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잔기술로 아무 데나 다리를 뻗고 여기가 내 자리 입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다지 제 글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라고 판명이 났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솔직히 이건 가정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저는 이제 글을 그만 써야 하는 것일까요? 누구 좋으라고 글을 그만 써야 하는 것일까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제가, 어쩌면 그 하나의 명분 만으로도 글을 계속 쓸 자격이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전 이기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제 글을 좋아하는 순간이 오는 그날까지 '내 글을 사람들이 좋아할까'라는 생각은 접어두려 합니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가장 큰 고민과 회의에 빠졌습니다. 이렇게 계속 쓴다고 해서 앞으로 그 어떤 변화도 없다면 과연 제가 지금처럼 이렇게 무식하게 글만 쓰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벌써부터 제 글을 읽어 본 저와 가장 친한 두 사람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넌 앞으로 10년을 써도 지금 이상의 글은 쓰지 못할 것 같다.
괜한 오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쓸데없는 똥고집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전 지금까지 글을 써온 1년을 포함해서 앞으로 딱 9년만 글을 더 쓸 생각입니다. 물론 출간이 목표는 아닙니다. 당연히 원래 목표는 출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등단이나 문학상 수상이 목표는 아닙니다. 이것 역시 제 처음의 목표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판단 중지하기로 한 이후 출간이나 등단 혹은 문학상 수상 등에 대한 욕심이 사라진 건 천만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전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것입니다. 아닙니다. 정확히 9년은 더 쓸 것입니다. 제가 1년에 1,000편 약간 넘게 쓰고 있으니 앞으로 9년을 더 쓰면 총 10,000편에 이르는 글을 쓰게 됩니다. 이 10,000편이라는 숫자에 어떤 의미가 있어서 그런 결심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정도까지 썼는데도 저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최소한 더 이상은 제 글에 대해서 제가 부끄럽지 않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땐 미련 없이 글을 손에서 놓을 것입니다.
뜬금없이 제가 이런 해괴망측한 글을 쓴 이유는,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지금 글을 쓰는 데 있어 상당한 회의감에 빠져 있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분이 이 글을 읽는다면 이런 저도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글을 쓰셨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 글을 써 주는 게 아닙니다. 내 글은 내가 쓰는 것입니다. 남들이야 뭐라고 하건 말건 간에 나 자신을 믿고 글을 쓰시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