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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Aug 07. 2024

책 페티시즘

삼백 여든여섯 번째 글: 내 자식은 내가 지켜야 한다.

종종 아내는 제게 이것도 병이라고 했지만, 서가에 꽂힌 책들을 보면 가슴이 벅차 오르곤 합니다. 일종의 페티시즘입니다. 그나마 이건 좋은 의미의, 혹은 타인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의 페티시즘입니다. 원래 페티시즘은 심리학적인 용어입니다. 생명이 없는 물건 또는 성적 부위가 아닌 인체 부위에 접촉함으로써 성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을 가리키는데 성적 도착증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심리 상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변태적 기질을 뜻하는 것이겠습니다.


한때 집에 있던 제 책이 대략 2천 권 될까 말까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늘 집이 좁아터진 이유가 바로 빌어먹을 그 책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책 좀 그만 사모으라는 것이지요. 그런다고 그 말을 들을 제가 아니었습니다. 다시는 안 산다고 다짐하고는 아내 모르게 야금야금 사다 모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존경하던 대학원 은사님께서 진정한 독서 교육은 책에 대한 페티시즘에서 출발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조금은 더 노골적으로 책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책만 사다 모으는 주제에 은사님의 말씀이 제게 변태가 아니라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2천 권을 훌쩍 넘어서자마자 공교롭게도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삿짐센터를 불렀는데, 그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삿짐센터의 인부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유형의 집이 바로 책이 많은 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이건 어패가 있는 얘기였습니다. 책보다 훨씬 크기도 크고 무게도 더 무거운 가전제품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조차도 '이 집엔 왜 이리 쓸데없이 책이 많아'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희 집엔 아이들 책까지 대충 4500권 정도 있었을 겁니다. 인부들은 그들이 가져온 플라스틱 박스에 책을 담았습니다. 나중에 다시 박스에서 책을 꺼내 놓으면 제가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박스에 일일이 기재하더군요. A, 1-2라고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A 책꽂이 첫 번째 줄의 두 번째 칸에 들어갈 책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원래 꽂혀 있던 순서대로 오차 하나 없이 제자리에 책을 정리하는 것까지 모든 게 완벽함 그 자체였습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나중에 정산하는 과정에서 심히 불쾌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책은 자기들이 애초에 기본적으로 설정해 놓은 박스의 개수를 초과한 것에 대해선 박스당 별도의 추가요금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왜 그런 것이냐고 물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규정이 그렇다고 하니 뭐라고 하겠습니까?


한창 이삿짐을 정리하고 집안 청소를 끝냈을 때 차를 마시던 아내가 기어이 한 마디 하더군요. 이미 추가 요금으로 지불한 돈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 난 김에 책 좀 처분하자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진작 정리했었다면 생각지도 못했던 비용을 지출하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물론 처분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제 책이었습니다. 오히려 제 책보다 더 많은 권 수의 아이들 책은 제외였습니다. 아이들 책은 공부하는 데에 필요하지만, 제 책은 도무지 쓸모가 없다고 하더군요.


책의 대량 살처분이 있었습니다. 멀쩡해 보이는 건 내다 팔고, 매입 물품 대상은 아니지만 책 상태가 준수한 것들은 지인들에게 분양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들은 그냥 노끈으로 묶어 고물상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때 전 내내 마음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집사람은 그런 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동안 저는 속앓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슴 아픈 과정을 거치고 난 뒤 제게 대략 5백 권쯤의 책이 남았습니다. 가끔 그 책들을 볼 때마다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저 책들은 지켜야 한다며 몇 번이고 다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어째 슬슬 불안해집니다. 이사하기 전처럼 야금야금 책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저는 저 책들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요?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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