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6월 하순 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가 잘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1년 2개월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글을 써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대략 하루에 서너 편씩 쓰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제게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굳이 하루에 몇 편이라고 못 박을 필요가 있느냐고, 또 몇 편을 쓰느냐 하는 게 뭘 그리 중요하겠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맞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 글의 편 수에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매일 쓴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쁜 날이라고 해도 최소한 두 편은 씁니다. 그것이 제 자신에게 맹세한 약속이고,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하는 글쓰기의 마지노선입니다. 이 두 편마저도 지켜내지 못하면 언젠가는 한 편을 겨우 쓰게 될 날이 올 겁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한 편도 띄엄띄엄 쓰다 펜을 놓는 일까지 발생할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처음의 마음은 흐지부지 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글쓰기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매일 글을 쓰는 데 있어 최대의 난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지금은 그렇습니다. 어떤 주제가 주어지든, 혹은 언제 어디에서든 저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물론 잘 쓰느냐, 읽을 만한 글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제가 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어쨌건 간에 글쓰기 연습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런 점에선 꽤 단련도 된 듯합니다. 그런데 이 글쓰기라는 것이 참 묘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한다고 해서, 또 마음먹는다고 해서 뜻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몇 달 동안 배드민턴에 미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A급인 어떤 선생님과 게임을 했는데, 14점을 접어주겠다고 하더군요. 저보고 자네는 1점만 내면 이긴다고 하면서, 1판이라도 이기면 저녁을 사주겠다고 하더군요. 비록 시작한 지 네 달밖에 안 되었지만, 설마 그 1점을 못 낼까 싶었습니다. 내리 여섯 판을 지고 나서 세상에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글쓰기도 배드민턴과 그 근본 이치는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고작 그 1점만 내면 된다며 몇 번을 다짐하고 노력해도 마음대로 안 되었듯, 어느 한순간이라도 글쓰기가 제 마음이나 의지에 따라 움직이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설을 예로 들었을 때, 누군들 고 박경리 선생이나 고 박완서 선생처럼 쓰고 싶지 않겠습니까? 누군들 무라카미 하루키나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쓰고 싶지 않을까요? 만약 여기에서 글쓰기는 천부적인 소질과 재능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글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개연성도 부족하고 스토리도 엉성한 소설을 써내는 삼류 소설가가 있습니다. 전자책으로 펴냈든, 자비로 종이책을 찍어냈든 한 권의 소설을 출간한 뒤에 어엿한 소설가 행색을 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은 소설가라는 호칭을 붙여선 안 됩니다. 그야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기껏 폼 잡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제가 과연 그들보다 하나라도 나은 점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글을 그리 오래 써왔다고 말할 처지가 못 됩니다. 혹 천부적인 소질이나 재능에 기대어 보려 해도 이 역시 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글쓰기를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문장을 쓸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게 됩니다. 더 아름답고 더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의욕은 흘러넘치지만,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치 뚜렷한 행선지도 없이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제 깜냥이고 제 한계인 것입니다. 깜냥을 키우는 일,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어쩌면 재능이나 소질보다는 굳건히 버텨내는 엉덩이의 힘에 달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글쓰기에 있어서 단 한 번도 제 깜냥을 키우거나 한계를 넘어서 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하면 분명 될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전 제 엉덩이의 힘을 믿으며 오늘도 한 편의 글을 써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