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경, 거짓말
삼백 아흔아홉 번째 글: 괜찮지 않은 것 같아요.
퇴근이 늦었습니다. 선생님들이 모두 집으로 간 지 오래입니다. 비록 제가 이 고즈넉한 시간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 있을 거라고는 저 역시 생각지 못한 일입니다. 걱정할 가족을 생각하니 얼른 발걸음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급해집니다. 차도 없는 데다 운전까지 하지 않다 보니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게 되면 역으로 가는 버스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위가 고요합니다. 학교 건물 주변에만 조명이 있을 뿐 그 어디를 둘러봐도 암흑 천지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있는 곳은 읍소재지 중에서도 조금은 떨어진 '리' 지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 건너편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들에서 뿜어내는 불빛들만 요란합니다. 그곳 외엔 온통 어두움뿐입니다.
밤이 되어서인지 학교 앞을 지나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차량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대략 80미터쯤 걸어 내려가면 작은 네거리가 있고, 신호등이 있습니다. 인적도 드물고 교통량도 적은 편이다 보니 6시 이후에는 점멸등으로 바뀌는 곳입니다. 바로 그 신호등을 건너 40미터 정도 걸어 내려가야 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늦은 시각 바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몇몇 차량들이 보입니다. 차창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초췌한 몰골입니다. 제가 피곤하듯 저들도 당연히 피로에 찌들어 있는 표정입니다. 안 그래도 몸이 천근만근인데 그들의 얼굴을 보니 더욱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어쩐 일인지 무겁습니다. 마치 죄수가 커다란 쇠공이 묶인 족쇄를 끌고 다니는 듯한 기분입니다.
하늘은 벌써 깜깜합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만 주변을 밝힐 뿐, 그 어디에도 빛이 닿는 곳은 없습니다. 뚜벅뚜벅,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제 걸음이 하나의 메아리가 되어 제 뒤꽁무니를 따라나섭니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이 거대한 실루엣으로 다가옵니다. 워낙 이상한 세상이라 남자가 다가올 때에는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해야 합니다. 다행히 실루엣의 주인공이 여자라면 저는 마음을 놓습니다만, 이번엔 저쪽에서 바짝 긴장을 하고 저를 지나쳐 갑니다.
드디어 버스 정류장에 섰습니다. 거기서부터 버스가 가는 방향까지는 내리막 길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풍광 자체가 저에겐 하나의 볼거리입니다. 어디에서, 또 언제 이런 야경을 볼 수 있을까요? 내리막 길을 따라 일정한 거리마다 가로등이 서 있습니다.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조금은 더 어두워지는 가로등을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약간은 희미한 빛이 퍼지며 주변을 비추고 있습니다.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전조등을 밝힌 채 지나갈 때면 사위가 갑자기 환해졌다가 이내 어두워지곤 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질 정도입니다.
버스에 올라탑니다. 온종일 긴장했던 마음이 비로소 놓여납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차창에 머리를 기대어 봅니다. 문득 차창에 비친 제 모습이 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초췌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건강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저는 말을 걸어 봅니다.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뜬금없이 잘 지내냐는 말이 제일 먼저 튀어나와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랍니다. 누군가가 툭 치고 지나가듯 물을 때면 늘 잘 지낸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아마도 거짓말이었나 봅니다. 그 간단한 질문에 저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니 조금도 괜찮지 않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이번엔 기차에 오릅니다. 몸은 늘어질 대로 늘어져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몇 글자 두드려대다 문득 차창 밖을 바라봅니다. 시야가 닿는 곳마다 장관이 펼쳐집니다. 어쩐 일인지 지금 보고 있는 이 풍광은 좀 더 현실적인 것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위에서 내려다본 야경은 어쩐지 다른 세상의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게 야경은 지금처럼 옆에서 나란히 본 것만 해당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맞지?"
아마도 그래서 다시 한번 눈치 없이 저에게 묻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괜찮아. 걱정 마. 끄떡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까."
대답은 그렇게 철석같이 합니다. 행여나 저도 모르는 제 자신이 놀랄까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가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전혀, 또는 조금도 괜찮지 않으면서 짐짓 괜찮은 척하고 있다는 걸 제가 먼저 알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사위의 풍광에 압도된 탓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눈부신 야경을 보면서 차마 괜찮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애꿎게 속으로만 되뇌어 봅니다. '나, 정말 괜찮아!'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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