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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Sep 07. 2024

절이 싫으면…….

사백 여덟 번째 글: 못 떠나는 상황이면 어떻게…….

유명한 우리 표현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스님을 비하하는 그런 발언은 아니라고 명백히 못 박아 두려 합니다. 누구에게나 통용되고 있는 표현이 그렇다는 것일 뿐이니까요.


어떤 스님이 한 분 계십니다. 물론 그분은 어떤 절에 소속되어 있을 것이고요. 절의 어떤 점에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을 수련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스님이라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사람의 습성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 그분에게도 그런 불만 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주지 스님이나 혹은 동료 스님일 수도 있고, 가령 매일 같이 절을 드나드는 신도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시스템적인 측면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정작 이런 불만(?) 사항이 있는 그 스님은 해결의 기미가 없는 부분에 대해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가진 고민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속 시원하게 말할 처지도 못될 것입니다. 이때 만약 그 스님이 용기를 내어 주지 스님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 스님 한 분 때문에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던 그것이 바뀔 가능성이 있을까요? 주지 스님이 싫다고 해서 그분 때문에 주지 스님이 다른 곳으로 갈 리도 없을 것이고, 마음에 안 드는 동료 스님이 마찬가지로 다른 곳으로 갈 이유도 없는 것이겠습니다. 설사 그 절을 드나드는 신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 신도에게 다른 절로 가라는 말을 할 수도 없을 것이고요. 결국 불만이 있는 그 스님이 할 수 있는 한 가지뿐입니다. 본인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뭣도 모르고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절에 소속된 스님이 그런 식으로 자유자재로 적을 옮길 수 있는지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까요.


요즘은 제가 이 스님이 된 기분입니다. 모든 것이 사람들의 취향과 성격에 어떻게 다 맞아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전 요즘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몇 가지로 인해 골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정작 저는 어떤 어떤 이유들로 불만 사항이 있습니다만, 보아 하니 제게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어지는 그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직장에서는 꽤 연차가 있는 편이라서 그리 쉽게 제 속내를 내놓고 얘기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게다가 이런 비슷한 일들을 겪어 본 분들은 알 것입니다. 큰마음먹고 말을 꺼내도 돌아오는 반응은 뻔합니다. 우리가 언제요, 혹은 에이 뭘 그런 걸로 고민하고 계세요, 하는 반응들이 대부분일 테니까요. 아마도 앓느니 죽는다는 말이 이럴 때 가장 적당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고 했지만, 저는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지금 수행하고 있는 이 직을 내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제가 내려놓는다면 누군가는 남은 2학기 동안 그걸 대신 이어받아서 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그 지경까지 간다면 그야말로 민폐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저 하나 편하자고 타인에게 커다란 짐을 안기고 마는 꼴이 되니까요.


그렇다면 이미 결론은 나온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참아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스트레스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정해진 1년 동안은 버텨내야 합니다. 학기는 아직 적지 않게 남아 있지만, 기껏해야 4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만 업무를 수행하면 지금의 이 짐을 벗어던질 수 있습니다.


다른 속담이나 표현들은 어느 것 하나 틀린 게 없지만, 적어도 이 표현은 수정되어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혹은 그런 생각을 포기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이미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세상보다 더 빠르게 사람들도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전의 그 감성 충만함이나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모습을 지금에 와 기대하는 건, 세상의 변화를 부정하고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리타분함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속칭 '낄끼빠빠'라고 하던가요? 끼일 데와 끼면 안 되는 곳을 잘 가려서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분위기가 좋아도 더 좋은 분위기를 위해서 빠져야 할 때에는 미련을 버리고 자리를 떠날 줄도 아는 기민한 판단력을 길러야 할 때입니다.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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