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백 열여덟 번째 글: 얼마 만인가요?
아직 낮 최고기온을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일어나자마자 창밖을 내다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온 사방이 비에 촉촉이 젖었더군요. 게다가 비가 내리고 나서 그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보고 있는 중에도 비는 줄곧 내리고 있었습니다. 보통 같았으면 하늘을 쳐다보며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었겠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내리는 비가 싫지 않습니다.
도대체 얼마 만에 맞는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그 덕에 덥지 않아 참 좋습니다. 그리 보면 뭐가 되었든 어중간한 것은 좋지 않다는 것 하나는 분명한 모양입니다. 7월과 8월을 건너오면서 늘 그랬던 듯합니다. 몇 번 오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내린다고 내렸던 비가 오다 말다, 찔끔찔끔했었으니 온 땅을 휘감고 있던 폭염을 밀어낼 수 없었습니다. 비가 온다고 예보되었던 날에도 늘 그런 패턴이 이어졌습니다. 비가 온다고 하니까 밖으로 나가려면 우산은 우산대로 준비해야 하고, 햇빛만 없다 뿐이지 땅 전체에서 뿜어내는 이글대는 열기에도 속수무책인 채로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온 집안이 덥지 않더군요. 늘 집안을 휘감았던 에어컨의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고, 혹시 비가 들이칠까 싶어 활짝 열어놓지는 못했지만, 아주 약간 열린 창문틈으로 스며드는 바깥바람에서도 더위는 없었습니다.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사람이 충분히 살 만하다고 말입니다.
마음 같아선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막걸리에 파전이라도 하나 걸치고 싶지만, 술을 못하는 제겐 그림의 떡입니다. 대신에 커피를 한 잔 진하게 타 창가에 섰습니다. 운치라고 해야 할까요? 커피의 향과 빗소리에 젖어 잠시 몰입했던 제게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청소기 돌려야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현실과 낭만 사이를 오고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잠시 고조된 기분을 누그러뜨리고 청소를 하려 준비 동작에 들어갑니다. 때마침 딸아이가 동영상 강의를 듣고 있어서 청소기를 돌리는 건 아무래도 여의치 않을 것 같습니다. 걸레봉에 바닥 청소용 물걸레를 부착해 바닥을 닦습니다. 일거양득, 바닥도 닦고 먼지를 밀고 밀어서 한 곳으로 모읍니다.
청소가 끝난 뒤에 일단은 집을 나섰습니다. 늘 그러했듯 노트북 장비를 백팩 속에 꾸린 채 등에 맸습니다. 그래 봤자 제가 가는 곳은 뻔합니다. 빈 가방이라면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지만, 노트북을 챙겼다면 결국 제가 가게 될 곳은 파스쿠찌밖에 없습니다.
실내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막상 밖에 나와서 느낀 풍경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렇게 싫어하던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은 이 비가 그리 싫지 않습니다. 비와 폭염 중에 어떤 것이 더 싫은가에 대한 판정이 이미 마음속에서 결정이 났다는 것이겠습니다. 아무리 비를 싫어한다고 해도 무더위를 잠시라도 쫓을 수 있다면 반기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니까요.
온 세상이 회색 천을 뒤덮은 듯 하늘이 우중충한 색깔을 하고 있고, 줄기차게 내리는 비에 더러 강풍까지 동반하고 있어 우산을 들고 보행하기 쉽지가 않습니다. 우산을 어깨에 걸치며 뒤로 젖히니 바람에 우산의 살이 뒤집힐 것 같고, 우산을 앞쪽으로 기울이니 등에 맨 가방이 젖습니다. 이럴 때에는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 상책이겠으나, 마냥 집안에서 비만 구경하는 건 더더욱 싫습니다.
지나가는 수많은 차량의 바퀴 밑에 짓눌리는 빗소리가 싫지 않습니다. 언덕 아래에서 차량등을 밝게 켠 채 달려오는 차들의 행렬도 좋아 보입니다. 이러다 결국은 가을이 오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만, 동물적인 감각이 아직 무더위는 물러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리고 있는 이 비가 가을비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진 출처: 글 작성자 본인이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