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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Sep 22. 2024

검정과 파랑

꿈꾸는 낭송 공작소 북토크, September 2024

"올리비에! 올리비에...." 캠벨 양이 소리쳤다. / "헬레나... 사랑하는 헬레나!" 그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 "바로 오늘 저녁에 녹색 광선을 있다고 확신합니다." / "녹색 광선...." 캠벨 양이 말했다.




쥘 베른의 녹색 광선(1882)은 로맨스 모험 소설이다. 녹색 광선을 쫓아 움직이는 사람들과 그 사이의 감정의 진폭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2024년 매월 꿈꾸는 낭송 공작소 북토크 또한 꿈을 향하는 사람들에게 내면의 녹색 광선을 찾도록 같이 걸어가며 새로운 모험과 변화를 이루게 하는 여정이다.


9월은 '할 때 힘들면 일, 안 할 때 힘들면 사랑'이 주제였다. 시낭송 공연을 하지 못한 날의 소년의 힘든 마음이해한다 할 수 있는 건, 타들어가는 소멸감, 사람에 대한 허무, 세상을 밀어내며 얻은 내 존재의 부재감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오히려 내가 하던 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런 사랑이 아닐까. 어떤 것이 자신의 현재가 되어야 하는지 알게 되는 놀라운 순간들 말이다.


녹색 광선을 찾던 그들이 서로에게서 본 검정과 파랑은 그 순간이 유일한 그들의 감정이며 모습이었을 것이다.


일몰 직전 대기의 붉은 광선의 파장이 둘을 하나로 조합하여 검정과 파랑으로 만나게 했을 것이라는 신경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더라도 색깔에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좋은 덕목을 읽는다.


헬레나는 편안하게 보호해 주는 강직함과 겸손하고 절제하는 태도를 올리비에의 눈으로부터 검은 광채느꼈고, 올리비에는 따뜻하고 차분한 신뢰와 마음과 순수, 편안히 영원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을 헬레나의 푸른 광채로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만나게 하는 긴 광선의, 이건 순전히 나의 개인적 해석이긴 하지만, 붉은색은 서로에 대한 강렬함과 힘, 정렬, 사랑, 기쁨, 용기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사랑을 이루는 그들은 색깔의 긍정적 의미뿐 아니라 뒷 면에 숨겨진 부정적인 부분들도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검정의 그늘과 파랑의 고독, 빨강의 경고는 빛나기만을 바라는 삶의 뒤에서 언제든 나올 틈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결국 색깔은 상관없다. 녹색, 검정, 파랑, 빨강, 그리고 내가 원하는 또는 네가 원하는 어떤 색이든.


매번 과거의 고착된 지식을 자랑하는 거만한 첫 약혼 예정자, 아리스토불러스 어시클로스는 과거를 증명하기 위해 현재를 소비한다.


올리비에 싱클레어는 지금을 말할 줄 알고 바로 지금 하는 것들을 소중히 여길 줄 안다. 현재의 열정을 이루기 위해 위험에 빠지기도 하는 올리비에를 읽으며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틀 밖의 세상에 대한 상상력은 삶의 공허를 메운다. 틀 안에 쌓아둔 고착은 눈을 높이 두고 튀어 오르기 위한 디딤돌로 충분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바라보는 눈이 어디로 어떻게 향하는지 왜 그리로 향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북토크에 개근 중이다. 아무도 관심두지 않지만 나만 혼자 흥분 중이다.


성적 우수상보다 개근상이 좋은 건, 성적은 과거를 증명하는 거지만 개근은 그 시간 그 자리에 제대로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그렇다. 지금은 바래진 개근상의 의미를 나는 항상 품고 산다.


9월 굿즈, 거울  

내가 9장에서 집중한 것은 '과거의 어느 순간이 아닌 현재의 발화 순간 (p.161)'이었다.


시낭송의 현재성은 실제 무대에 서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그 낭송가의 발화의 순간으로 알 수 있다. 계단을 통해 무대로 오르며 달라지는 그의 감성이 그 순간의 발화, 현재성이라 생각했다.


가르치는 사람들이 외우고 쌓아둔 원고에 의존하지 않고 바라보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 남겨두는 그 여백의 수축 팽창하는 움직임이 그 현재성인 것이다. 이전, 그다음의 것과는 당연히 다른.




부재의 가치에 대해 사색하며 각자 처한 현실의 만남과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짧은 장이지만 따라 나온 이야기들은 가슴을 서늘하게 하기도 하고 내가 쥐고 있는 것들에 대한 반성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사람을 만나고 집에 돌아갔을 때 뭔가 숙제를 한 느낌인지 아니면 계속 생각나서 뒤척이는지, 스펙 만들기에 골몰한 사회에서 거기에 몰두하지 않을 때 편안하지는 않은지, 그런 비유들로 마음의 밭이 뒤엎어지고 있었다.


아날로그적 인간의 회복은 본질적인 내면의 회복을 위한 인문학적 가치와 연결될 것이다. 작가의 그런 마무리는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여운으로 남았다. 마음의 근육을 다지기 위한 몸의 움직임, 연필을 깎으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 같은, 그런 아날로그의 힘을 기억해 냈다.


현대의 속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히키코모리, 연락하고 말하고 뛰어가 받아오는 '당근'시스템을 들으며 작가가 현재와 연결하려는 의도와 가치를 정리했다.


나는 일 같은 사람일까. 나는 대체 가능한 사람일까.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항상 뻗고 있는 나의 손을 불안해하며 뭔가 말을 해야지 할 때 이미 북토크는 끝나가고 있었다.


말 못 한 남은 것들은 오롯이 나의 몫일 것이다.



[책] 녹색 광선, 쥘 베른, 1882 / 박아르마 역, 2016, 딴짓의 세상(기획자의 녹색 광선에 대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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