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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Sep 23. 2024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오늘은 퇴근이 조금 늦었습니다. 학교 상담 주간을 맞아 이것저것 준비할 것들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일하지 않는 시간엔 시쳇말로 그저 멍을 때리거나 가벼운 음악을 들었으면 들었지, 마음 잡고 글을 쓸 형편은 못 됩니다. 왜 그런지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쫓기거나 하는 마음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학교에서는 마음 편하게 글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직장이라는 중압감이, 혹은 언젠가는 해야 할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긴 합니다.


늦은 시각에 버스를 타고, 다시 기차를 타고 집에 오는 건 확실히 피곤한 일이긴 합니다. 다만 그 피곤함이 때론 묘하게도 몽환적인 느낌을 가져다주면서 역설적으로 아늑한 휴식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혹시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경험을 한 번쯤을 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쉼 없이 몰아치는 하루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나 기차 좌석에 기대어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편안하면서도 더러는 행복한 기분이 드는지 말입니다.


그런 기분을 만끽하며 기쁜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역으로 왔습니다. 학교에서 역으로 오는 버스 시각과 역에서의 기차 출발 시각이 맞지 않아 1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습니다만, 뭐 이왕 늦은 거 하며 안 그래도 늦은 시각에 여유 아닌 여유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내일도 더 많은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지금껏 살아보니 대비를 한다는 것과 마냥 걱정만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경우라는 것을 익히 느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의 대비는 할지라도 웬만하면 사서 걱정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걱정한다고 해서 어떤 일이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된다거나 혹은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 올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런 걱정들이 필요한 때에 상황에 알맞은 말이나 행동을 못하게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하니까요.


집에 들어오니 어느덧 10시, 다른 선생님들은 이미 4시 반에 퇴근을 해서 일찍 집에 도착한 사람은 5시도 채 안 되어 각자의 볼 일을 보고 있을 시간입니다. 도대체 뭘 한다고 이 시각까지 있었나 싶긴 합니다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을 해 놓고 집에 오니 마음만은 그저 편할 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낮 동안 최소한 오늘은 폭염으로 고생한 일도 없었고, 하루 종일 선선한 기분으로 지냈으니 기분도 나쁘진 않습니다. 게다가 들어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내친김에 샤워까지 마치고 나니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부처가 내 안에 있다고 하듯, 천국이 뭐 어디 멀리 있겠습니까? 이렇게 아무 근심 없이 제 방에 앉아, 또 노트북까지 펼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면,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하지요. 실컷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하고 그제야 집으로 돌아오니 이곳만큼 편한 곳은 없다고도 하지요. 가히 이 정도라면 '즐거운 나의 집' 어쩌고 저쩌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을 쓰며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말입니다. 제가 생각한 대로 순탄하게 하루가 흘러갔는지, 혹시 이 짧은 여정을 마치는 동안 우여곡절이나 시행착오는 없었는지도 돌아보게 됩니다. 분명 이것은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하기 위한 저만의 엄숙한 의식일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너무 좋습니다. 출간에 대한 욕심도 부질없습니다. 책이라는 게 출간만 할 수 있다면 하등의 나쁜 점은 없다고 해도, 글쓰기의 목표는 출간이 아니라 오로지 글쓰기여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등단에 대한 욕망도 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럴 깜냥이 안 되는 것은 기정사실, 이와는 상관없이 매일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한 것입니다. 혜성처럼 등단해서 연기처럼 사라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굳이 글을 쓸 이유는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다지 읽을거리가 없는 글이긴 합니다만, 걷어내고 걷어내니 적어도 이것 하나만큼은 좋은 것 같습니다. 제 자신에게 가장 솔직하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말입니다.


뭐, 그렇게 생각하려 합니다.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혹은 적다면 또 어떻습니까? 누구보다도 제 글을 사랑하고 읽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감사하게도 오며 가며 읽어주시는 분들도 있고, 댓글까지 달아주시며 소통하는 분들도 계시니 이만하면 충분히 글을 쓰는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천국이 멀리 있지 않듯 행복도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편안한 곳에 앉아 생각을 음미하며 글을 쓰고 있는 제 자신이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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