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백 스물네 번째 글: 이 정도 비면 뭐 참아줄 수 있습니다.
지금 학교 길건너편에 있는 빽다방에서 바닐라 라떼를 마시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 경남 진주에서 열리는 '제73회 개천예술제 전국 음악경연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우리 반 아이들을 보기 위해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저희 학교에는 오케스트라가 있는데, 전국의 대회라는 대회는 다 참여하고 있어서 자주 각지로 다니곤 합니다. 하필이면 개천절인 오늘 그래서 진주에 갔고, 조금 이따 한 시간쯤 뒤에 학교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늘 타지로 대회를 갔다 오면 한 번이라도 보고 가야지 했지만, 늘 귀교 시각이 늦는 바람에 한 번도 아이들을 보지 못했기에 오늘은 큰마음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제 한 시간만 기다리면 아이들이 도착합니다. 사실 이 시각에 학교에 가봤자 당직 주사님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해야 하고, 아무도 없는 교실에 가봤자 글쓰기 외에는 별달리 할 일도 없으니, 그럴 바에는 커피숍에서 음료나 마시며 글을 쓰는 게 더 낫겠다 싶었습니다. 그 덕에 오늘도 적지 않은 글을 썼습니다. 이건 완전히 임도 보고 뽕도 따는 격입니다. 지금 한창 학교로 달려오고 있을 아이들도 기다리면서 글도 쓸 수 있으니 말입니다.
때마침 개천절이라고 하늘도 열린 건지 정말이지 모처럼 만에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비를 아주 싫어하는지라 이 비가 반가울 리는 없지만, 그나마 굳이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만 내리고 있으니 그리 싫어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 비가 완연한 가을비려니 생각한다면 평소처럼 그렇게 내리는 비를 저주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이젠 저녁 식사도 다 하고 하루를 온전히 쉬려는 사람들의 바람 때문일까요? 이 작은 커피전문점 안이 사람들로 넘쳐 납니다. 다섯 개의 테이블에 사람들이 차지하고 앉아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우며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남자는 저까지 포함해서 4명, 여자분은 12명, 모두 16명의 사람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제 막 한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 2명과 여자 3명이 나갔으니 실내에 남은 사람은 11명입니다. 그러던 중에 나머지 남자분까지 나가는 바람에 지금 매장 안에는 남자라고는 저밖에 없습니다.
저렇게도 할 이야기들이 많은 걸까요? 하긴 얼마 전에 아내가 지인과 통화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무려 세 시간 동안 전화 통화를 하더군요. 마침 외박을 나와 있던 아들과 저는 정말 오랜만에 통화하는 사람인 모양이구나 싶었습니다. 한창 뭔가를 먹고 마시다 우린 하마터면 입에 머금고 있던 것을 죄다 뿜을 뻔했습니다. 세 시간의 통화 끝에 마지막으로 아내가 통화 상대방에게 건넨 마지막 말 때문이었습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제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세 시간 동안만 얘기한 건 뭐냐고 말입니다. 세 시간이나 얘기했는데도 아직 본론도 꺼내지 못한 거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원래 여자들은 만나면 할 말이 많다고 하더군요. 남자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방금 전에 막 들어온 남자 2명은 폰만 들여다보느라고 정신이 없고, 나머지 한 명의 남자인 저는 이러고 있느라 입도 떼지 않고 있는 중입니다. 이 작은 커피숍 안이 온통 여자분들의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리고 있습니다.
뭐, 싫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그들의 말소리가 제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졸음이 몰려올 때 자장가처럼 그들의 음성이 거슬리진 않습니다. 밖에는 추적추적(사실 이 표현도 너무 식상합니다. 아마도 고 현진건 선생의 운수 좋은 날에서 나왔던 이래로 비만 오면 이 표현이 쓰였던 걸로 압니다만) 비가 오고 있고, 커피전문점 실내에는 누가 부르는지도 모르는 감미로운 발라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 포진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고, 저는 노트북만 노려보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는 게 뭐, 별 것 있겠습니까? 이렇게 각자 할 일을 하면서, 또 때로는 마음을 어루만지며 하루를 마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한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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