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K동 행정복지센터 → 400m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안내 표지판이 맨 먼저 눈에 띄었다. 한시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철민은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렸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거친 숨소리와 일그러진 얼굴을 본 몇몇 사람들이 가자미 눈을 흘겨대며 지나갔다. 누군가와 어깨를 맞부딪쳐 몇 번은 주춤해야 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할 겨를이 없었다. 아니, 굳이 그러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더러는 아는 사람도 한둘 보였던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철민의 달음박질을 막을 순 없었다. 남은 거리를 단숨에 주파한 철민은 어느새 행정복지센터 출입문에 손을 얹었다. 마치 긴 시간 잠수하다 나온 사람처럼 철민은 참았던 숨을 기어이 내지르고야 말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두툼한 뿔테 안경에 뿌연 김이 서렸다. 급한 마음에 엄지손가락으로 안경을 문질렀더니 흐릿하게 퍼진 자국만 짙게 남아버렸다. 철민은 비상구 쪽에 놓인 정수기로 가 목부터 축였다. 작은 종이컵이 쓰레기통으로 던져지길 기다리기도 한 듯 데스크에 앉아 있던 민원 담당 여직원이 또 오셨냐며 인사를 건넸다.
“주민등록등본 한 통 부탁합니다.”
신분증을 건네받은 여직원은 철민의 인적 사항을 입력했다. 아마도 분명 다른 사람의 내용을 입력할 때보다는 빠른 속도로 입력이 가능했을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입력하는 것이었으니 어쩌면 이미 외워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류가 프린터에서 나오는 동안 철민은 물끄러미 출입문 밖을 응시했다. 늘 눈에 띄던 사람들이 지나갔다. 넘칠 만큼 폐지를 가득 주워 담은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가는 할머니가 보였다. 계란을 판다며 대대적으로 광고하는 트럭도 느린 속도로 지나갔다. 맞은편 좁은 골목에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몇몇이 담배를 줄곧 피워댔고, 학교를 방금 마친 듯 재잘대며 지나가는 여학생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모든 게 한 달 전의 풍광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똑같았다고 느꼈다면 착각이었을까?
철민은 서류를 받아 들기도 전에 이번에도 헛걸음을 한 것이 아닐까 싶은 모종의 불안감을 느꼈다.
“자주 오시는 걸 보니 쓸 데가 많으신가 봐요? 매번 번거롭게 오시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발급이 가능하다는 건 알고 계시죠?”
마치 카세트테이프를 재생이라도 한 듯 올 때마다 그녀가 던지는 말은 한결같았다. 철민은 언제나처럼 등본을 내밀며 방긋 웃는 그녀에게 약간 고개만 숙이고는 데스크 맞은편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반드시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만큼은 분명히 제대로 기재되어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등본을 펼쳐 들었다. 채 프린터 잉크의 온기도 가시지 않은 빳빳한 종이에서 진한 잉크 냄새가 퍼져 나왔다. 철민은 익숙한 눈길로 좌측 상단을 더듬었다.
세대주 : 박철민
처 : 강지윤
두 줄만 확인해도 충분했다. 아이들의 이름이 기재된 곳까지 훑어볼 필요도 없었다. 지난달에도, 그리고 두세 달 전에도 보았던 내용과 달라진 데는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철민은 한참 동안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건 분명 뭔가가 잘못됐어!’
세대주라 하면 엄연히 한 집안의 가장이면서 주인인 사람을 일컫는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그렇게 보면 분명 철민이 가장이자 집주인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서류상 부여된 지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철민은 알고 있었다.
신혼여행지에서 승선기록부에 기재할 때 당당히 썼던 자신의 이름이, 전세아파트 계약서에도 어김없이 적어 넣었던 그 이름이, 어디까지나 글자로서의 의미만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하고 만 셈이었다.
서류는 말하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실질적인 세대주는 분명 철민이 아니라 지윤이라고. 철민은 더는 쓸 데도 없는 주민등록등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문을 열자마자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철민을 맞이했다.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4인용 소파, 여전히 한 자리만큼은 새것처럼 표면이 반질반질했다. 물론 앉을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철민의 자리였다. 과연 저 자리에 앉아 본 게 언제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최근에 앉았던 날이 언제인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지윤의 집엔 세 사람만 살고 있고, 거기에 철민이 끼어있다는 건 철민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윤과 딸 그리고 아들……. 슬프게도 이 아파트는 철민의 집이 될 수 없었다. 지윤과 지윤의 아이들이 살고 있는, 명백히 그들만의 아파트였다.
불을 끄자, 컴컴한 아내의 아파트는 꿈을 꾼다
아내의 아파트에는 나와 아내와 아내의 아이들이 함께 잔다
나는 침대에서 홀로 자고
아내는 양팔에 하나씩 아이들을 품고
방바닥에서 씩씩하게 누워 잔다 *
어디서 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던 시가 문득 떠올랐다. 어느 날 보자마자 단숨에 마음이 빼앗겨 버려 밑도 끝도 없이 외워 버린 시였다.
‘아내의 아파트에는 나와 아내와 아내의 아이들이 함께 잔다.’
이 대목을 읽던 순간 철민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좀 더 그 뜻을 명확하게 하자면 아마도 이렇게 되었어야 옳을 것이다. 지윤의 아파트에는 나와 지윤과 지윤의 아이들이 함께 잔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지윤과 지윤의 아이들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말 그대로의 한 세트란 뜻이다. 철민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고는 없는, 결코 허물어뜨릴 수 없는 완전체로서 말이다. 당연히 그 속에 철민의 몸 하나 누일 자리는 없었다.
넉넉한 크기의 더블 침대에서 오늘도 철민은 혼자 잠들어야 한다. 가끔은 어쩌면 지윤이 옆자리에 눕게 되는 영광스러운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때의 지윤은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을 터였다. 적어도 지윤의 마음만은, 양팔에 하나씩 아이들을 껴안은 채 자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곳에서도 철민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어쩌면 내일도…….
두 아이들이 철민의 아이들인 것도, 지윤이 철민의 지윤인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윤의 아파트는 철민의 아파트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주민등록등본에 찍힌 세 글자가 그걸 보증하고 있었다. 서류상으로만 효력을 발휘하는 세대주일 뿐이라는 사실도……. 물론 그 세 글자가 지금 당장 사라진다고 해도 나머지 세 사람에겐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할 게 분명했다.
* 정병근, 『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 「아내의 아파트」중 일부 발췌, 60~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