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요란하게 거실을 울리던 TV 소리가 끊어졌다.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는 신호였다. 지윤이 안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창고 겸 서재로 쓰고 있는 자신의 방에서 신문을 뒤적이던 철민도 한 시간쯤 뒤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을 청하기 위한 건 아니었다. 실내를 환하게 밝혀 놓고 자는 게 습관이 된 지윤이 잠에 들면 불을 끄는 것, 그것이 철민의 하루 일과 중 마지막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잠들기 전에 직접 끄면 되지 않느냐고, 왜 이걸 자신이 해야 하느냐고 지윤에게 굳이 묻지 않았다. 서로 부딪치지나 않는다면 이쯤의 번거로움은 충분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서서 이미 깊은 잠이 든 지윤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다. 어쩌면 선잠에 빠진 채 귀로 모든 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계속 같이 살아가야 할까?’
바디샤워인지 향수인지 모를 묘한 냄새가 연신 코끝을 간질였다.
- 이런 때엔 냄새가 아니라고 향이라고 해야 한다고 내가 몇 번 말했어?
지윤은 매번 철민의 말실수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가족이니까 사소한 것쯤은 눈감아 줄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철민이 투정을 부리면, 가족이라서 더 냉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지윤이었다.
사십 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볼륨감 있는 지윤의 뒤태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거리는 저 원피스 잠옷만 들추면 얼마든지 몸을 더듬을 수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매몰차게 뿌리치곤 했던 모습이 떠올라 철민은 모처럼만에 꼼지락대던 손을 거둬들였다. 하긴 그런 마음이 일어나다가도 제풀에 꺾일 때가 더 많은 철민으로서도 그다지 아쉬운 점은 없었다. 욕구 배출구로서의 지윤을 원했던 철민과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결코 허락할 수 없다는 지윤이었다. 둘 사이에 사랑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혼자 해결하는 데에 익숙해져 버린 그였다.
결론도 없는 혼자만의 생각을 떠올리던 철민은 서재로 다시 건너와 딱딱한 맨바닥 위에 몸을 뉘었다. 평소대로라면 어두워야 할 방 안이 창문으로 비치는 맞은편 아파트의 조명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철민은 이리저리 몸만 뒤척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 2시. 허공을 가르는 난데없는 굉음들. 시원스레 뻗은 도로 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가 몇 대씩 무리를 지어 언덕을 넘어갔다. 여기저기 빽빽이 들어선 상록수들에 가려 가로등마저 빛을 잃고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철민은 다 타 버린 담배 한 개비를 어둠 속으로 던져 버렸다. 점점 어두워져만 가는 아파트 뒷마당 주차장엔,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기라도 하는 듯, 힘 있는 구둣발 소리 하나가 이 깊은 적막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쪽은 철저한 어둠일 뿐이었다.
그 어둠 때문인지 이 시각에도 불야성을 이루는 맞은편 아파트는 오늘도 홀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무슨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을 보고 있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철민은 남아있던 연기가 하늘로 흩어지는 것을 보다 무심코 건너편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말았다. 101호에서 3501호로 보이는 곳까지 차례차례 켜지는 실내등에 눈이 멀 지경이었다. 얼마 전 신축한 아파트 입주 예정 기일을 앞두고 이를 만천하에 알리려는지, 천여 세대가 넘는 곳에서 천 개 이상의 불빛을 장엄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이보다 더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본 적이 있었던가?
사실 철민은 어떤 이유로든 지윤에게 무능력하고 생활력 없는 남편으로 낙인이 찍힌 상태였다. 남들이 흔히 하는 술도 입에 대지 않아 자기 생활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성실한 그 모습에 끌려 지윤은 철민과 결혼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그저 소심함과 나태함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했던,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것에 다름없는 것이라던 지윤이었다.
지윤은 철민에게 그랬다. 사람이라면 평생에 세 번은 꼭 찾아온다던 기회를, 그것도 벌써 두 번이나 놓쳐 버리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철민이라고 했다.
- 사람이 어떻게 양심도 없어? 어떤 식이 되었든 노력은 해 봐야 할 거 아냐? 언제까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가만히 있다가도 다짜고짜 윽박지르곤 했던 지윤에게 철민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욕심이 지나치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지윤에게, 왜 지금의 이 삶이 구질구질하다는 단어 하나로 정리되어야 하는지,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건지 따지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런다고 해서 순리대로 풀려 갈 얘기는 아니었다.
- 경제력도 없는 주제에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어떤 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든 아마도 지윤은 그렇게 말할 터였다. 돈도 제대로 못 벌어오는 사람에겐 발언권조차 없다고 말이다. 이젠 그런 사실도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양심 운운하는 정도까지 이르게 되고 말았지만, 생각이 다른 걸 두고 굳이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철민은 넌지시 자기 몸을 뉘어 세찬 바람을 이겨 내는 갈대를 생각했다. 어떤 일이 있든 그저 넘실대기만 하며 생을 이어가는 이름 없는 갈대를…….
저 닭장처럼 지저분하기 짝이 없던 아파트가 하늘이라도 뚫을 듯 자태를 뽐내며 들어서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기저기 유리창이 깨진 곳을 테이프로 발라놓은 흔적, 밖에서 사람이 보든지 말든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바람이 불 때마다 나부끼곤 하던 빨랫대에 널린 여자의 낡은 속옷들, 온갖 낙서와 발자국 등으로 얼룩진 아파트 외벽……. 막상 이곳에 와서 처음 봤을 때 무슨 무허가 철거예정지인 줄 알았던 아파트였다. 사람들은 그 낡고 지저분한 모습에 지은 지 35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한 거 아니겠냐는 말들을 했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10년 뒤에 지은,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가 더 새것이라는 데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때의 낡았던 그 아파트는 밖에서 얼핏 봐도 스무 평 남짓 될까 말까 한 것이었다. 게다가 엘리베이터 하나 없는 5층짜리 아파트였다. 처음 신혼집을 구할 때에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종아리에 알이 배기도록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신혼살림을 차린다는 게 어쩌면 첫출발부터 삶이 삐걱거리는 단초가 될 것 같아 포기하고 온 아파트였다. 그 한 번의 선택이 삶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걸 왜 미리 짐작하지 못했을까?
- 이건 분명히 나락이야!
살아 있는 동안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상상 속의 세계가 나락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윤은 버젓이 잘 살아가고 있는 철민과 지윤의 삶을 싸잡아 나락이라고 표현했다. 사실 지윤의 말이 아니더라도 철민 역시 탐탁지 않긴 했다.
많이 쳐 줘 봤자 철민이 살던 아파트의 반값 정도밖에 되지 않던 그 허름한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불과 몇 년 만에 족히 다섯 배가 넘는 새집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부러움을 넘어 절망감에 빠져들게 했다. 물론 웃돈을 더 얹어줘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충분히 무리하게 대출을 해서라도 거머쥘 만한 것이었다. 아파트 곳곳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그런 얘기들이 들렸다.
-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저 낡아빠진 걸 하나 주워놓길 잘했지. 정말 이건 횡재야. 로또가 따로 없다고!
저층아파트 재건축 소리가 들릴 때부터 사람들은 긴가민가했었다.
- 에이, 뭐 그럴까? 어떻게 20평 입주자에게 33평을 준다는 말이야? 그건 말도 안 돼!
공사를 위해 세간을 내어갔던 저층 입주자들, 약 2년 정도의 불편함 뒤에 안겨진 번듯하고 훨씬 넓어진 아파트에 그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지금도 몇몇 집은 미분양이라 입주자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철민은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두 배를 호가하는 돈을 줘 가면서까지 이사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민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