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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13. 2024

세대주 성명

#2.

요란하게 거실을 울리던 TV 소리가 끊어졌다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는 신호였다지윤이 안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창고 겸 서재로 쓰고 있는 자신의 방에서 신문을 뒤적이던 철민도 한 시간쯤 뒤 안방으로 들어갔다잠을 청하기 위한 건 아니었다실내를 환하게 밝혀 놓고 자는 게 습관이 된 지윤이 잠에 들면 불을 끄는 것그것이 철민의 하루 일과 중 마지막의 것이기 때문이었다잠들기 전에 직접 끄면 되지 않느냐고왜 이걸 자신이 해야 하느냐고 지윤에게 굳이 묻지 않았다서로 부딪치지나 않는다면 이쯤의 번거로움은 충분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서서 이미 깊은 잠이 든 지윤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다어쩌면 선잠에 빠진 채 귀로 모든 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계속 같이 살아가야 할까?’

바디샤워인지 향수인지 모를 묘한 냄새가 연신 코끝을 간질였다.

이런 때엔 냄새가 아니라고 향이라고 해야 한다고 내가 몇 번 말했어?

지윤은 매번 철민의 말실수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가족이니까 사소한 것쯤은 눈감아 줄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철민이 투정을 부리면가족이라서 더 냉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지윤이었다.

십 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볼륨감 있는 지윤의 뒤태가 눈에 들어왔다하늘거리는 저 원피스 잠옷만 들추면 얼마든지 몸을 더듬을 수 있었지만그럴 때마다 매몰차게 뿌리치곤 했던 모습이 떠올라 철민은 모처럼만에 꼼지락대던 손을 거둬들였다하긴 그런 마음이 일어나다가도 제풀에 꺾일 때가 더 많은 철민으로서도 그다지 아쉬운 점은 없었다욕구 배출구로서의 지윤을 원했던 철민과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결코 허락할 수 없다는 지윤이었다. 둘 사이에 사랑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어차피 혼자 해결하는 데에 익숙해져 버린 그였다.

결론도 없는 혼자만의 생각을 떠올리던 철민은 서재로 다시 건너와 딱딱한 맨바닥 위에 몸을 뉘었다평소대로라면 어두워야 할 방 안이 창문으로 비치는 맞은편 아파트의 조명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철민은 이리저리 몸만 뒤척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 2허공을 가르는 난데없는 굉음들시원스레 뻗은 도로 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가 몇 대씩 무리를 지어 언덕을 넘어갔다여기저기 빽빽이 들어선 상록수들에 가려 가로등마저 빛을 잃고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철민은 다 타 버린 담배 한 개비를 어둠 속으로 던져 버렸다점점 어두워져만 가는 아파트 뒷마당 주차장엔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기라도 하는 듯힘 있는 구둣발 소리 하나가 이 깊은 적막을 가로지르고 있었다어찌 되었든 이쪽은 철저한 어둠일 뿐이었다.

그 어둠 때문인지 이 시각에도 불야성을 이루는 맞은편 아파트는 오늘도 홀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무슨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을 보고 있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철민은 남아있던 연기가 하늘로 흩어지는 것을 보다 무심코 건너편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말았다. 101호에서 3501호로 보이는 곳까지 차례차례 켜지는 실내등에 눈이 멀 지경이었다얼마 전 신축한 아파트 입주 예정 기일을 앞두고 이를 만천하에 알리려는지천여 세대가 넘는 곳에서 천 개 이상의 불빛을 장엄하게 뿜어내고 있었다이보다 더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본 적이 있었던가?


사실 철민은 어떤 이유로든 지윤에게 무능력하고 생활력 없는 남편으로 낙인이 찍힌 상태였다남들이 흔히 하는 술도 입에 대지 않아 자기 생활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성실한 그 모습에 끌려 지윤은 철민과 결혼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그저 소심함과 나태함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했던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것에 다름없는 것이라던 지윤이었다.

지윤은 철민에게 그랬다사람이라면 평생에 세 번은 꼭 찾아온다던 기회를그것도 벌써 두 번이나 놓쳐 버리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철민이라고 했다.

사람이 어떻게 양심도 없어어떤 식이 되었든 노력은 해 봐야 할 거 아냐언제까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가만히 있다가도 다짜고짜 윽박지르곤 했던 지윤에게 철민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자신의 욕심이 지나치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지윤에게왜 지금의 이 삶이 구질구질하다는 단어 하나로 정리되어야 하는지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건지 따지고 싶을 때도 많았다그런다고 해서 순리대로 풀려 갈 얘기는 아니었다.

경제력도 없는 주제에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어떤 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든 아마도 지윤은 그렇게 말할 터였다돈도 제대로 못 벌어오는 사람에겐 발언권조차 없다고 말이다이젠 그런 사실도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았다물론 그것이 양심 운운하는 정도까지 이르게 되고 말았지만생각이 다른 걸 두고 굳이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철민은 넌지시 자기 몸을 뉘어 세찬 바람을 이겨 내는 갈대를 생각했다어떤 일이 있든 그저 넘실대기만 하며 생을 이어가는 이름 없는 갈대를…….


저 닭장처럼 지저분하기 짝이 없던 아파트가 하늘이라도 뚫을 듯 자태를 뽐내며 들어서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기저기 유리창이 깨진 곳을 테이프로 발라놓은 흔적밖에서 사람이 보든지 말든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바람이 불 때마다 나부끼곤 하던 빨랫대에 널린 여자의 낡은 속옷들온갖 낙서와 발자국 등으로 얼룩진 아파트 외벽……막상 이곳에 와서 처음 봤을 때 무슨 무허가 철거예정지인 줄 알았던 아파트였다사람들은 그 낡고 지저분한 모습에 지은 지 35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한 거 아니겠냐는 말들을 했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10년 뒤에 지은,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가 더 새것이라는 데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때의 낡았던 그 아파트는 밖에서 얼핏 봐도 스무 평 남짓 될까 말까 한 것이었다게다가 엘리베이터 하나 없는 5층짜리 아파트였다. 처음 신혼집을 구할 때에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종아리에 알이 배기도록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신혼살림을 차린다는 게 어쩌면 첫출발부터 삶이 삐걱거리는 단초가 될 것 같아 포기하고 온 아파트였다. 그 한 번의 선택이 삶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걸 왜 미리 짐작하지 못했을까?

이건 분명히 나락이야!

살아 있는 동안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상상 속의 세계가 나락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윤은 버젓이 잘 살아가고 있는 철민과 지윤의 삶을 싸잡아 나락이라고 표현했다사실 지윤의 말이 아니더라도 철민 역시 탐탁지 않긴 했다.


많이 쳐 줘 봤자 철민이 살던 아파트의 반값 정도밖에 되지 않던 그 허름한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불과 몇 년 만에 족히 다섯 배가 넘는 새집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부러움을 넘어 절망감에 빠져들게 했다. 물론 웃돈을 더 얹어줘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충분히 무리하게 대출을 해서라도 거머쥘 만한 것이었다. 아파트 곳곳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그런 얘기들이 들렸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저 낡아빠진 걸 하나 주워놓길 잘했지정말 이건 횡재야로또가 따로 없다고!

저층아파트 재건축 소리가 들릴 때부터 사람들은 긴가민가했었다.

에이뭐 그럴까어떻게 20평 입주자에게 33평을 준다는 말이야그건 말도 안 돼!

공사를 위해 세간을 내어갔던 저층 입주자들약 2년 정도의 불편함 뒤에 안겨진 번듯하고 훨씬 넓어진 아파트에 그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지금도 몇몇 집은 미분양이라 입주자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철민은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두 배를 호가하는 돈을 줘 가면서까지 이사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민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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