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며 쉽게 단념해 버린 철민은 그쪽으론 고개조차 돌리는 법 없었다. 특히 지윤이 보고 있을 때에는 더더욱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려 했다. 그와는 달리 지윤은 지금이라도 그 돈을 줘서라도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역력했다. 심지어는 몇 천만 원만 주고 그때 그 집을 샀더라면 지금쯤 배 두드리고 살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며 몇 날 며칠을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했다.
그 정도에서 그친다면 차라리 다행이겠다. 첫 번째 기회는 그렇다 쳐도, 어디서 들었는지 곧 재개발된다며 지금이라도 저층 하나 사놓자, 는 간절한 지윤의 말을 깡그리 무시해 버린 것에 대해선 두고두고 원망을 들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뭐, 그렇다고 꼭 나쁜 일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껏 4년을 살아오면서 늘 불편하게 생각했던 일이 말끔히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아파트에 사는 천여 세대가 넘는 주민들이 그렇게 민원을 넣어도 반응이 없던 구청이 드디어 대로변에 인접해 좌회전 교차로와 신호등까지 신설해 주기로 한 것이다. 좋게 해석하자면 천여 세대였던 이 인근의 인구가 삼천여 세대로 늘어났으니 구청으로선 움직여야 할 명분이 있었다지만, 이런 결과조차도 지윤은 부의 차이가 가져온 효과라고 믿었다.
철민은 어떤 식이 되었든 이제 삶이 조금은 편해졌다는 데에 만족하고 싶었다.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해서 그리 나쁠 건 없지 않냐고 구슬려봐도 그조차도 지윤은 자존심이 상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까지도 빈부의 격차를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다며 모든 건 결국 돈이 말해 주는 거라 했다.
- 당신, 그거 알아? 우리나라에서 돈 없이 사는 건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는 길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걸 말이야.
작은 소방 도로가 어느새 준 대로급으로 길이 넓혀졌다. 이젠 더 이상 고속도로 I.C.로 진입하기 위해 거의 두 블록이나 올라가서 U턴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며칠만 있으면 이 길도 북새통을 이루리라. 삼천여 대 이상의 자동차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테다. 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인도를 가득 메우리라. 어쩐지 앞으로 갑갑한 상황이 끊임없이 재생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갑갑한 마음에 담배라도 피우려고 철민은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신축아파트를 맞닥뜨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철민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다물었다. 언제 왔는지 두어 발짝 뒤에 지윤이 서 있었다. 옆에 선 사람이면 누구라도 태워버리고 말겠다는 듯 날이 선 지윤의 눈빛과 표정 속에 비장함이 묻어났다. 마치 길을 가다 절벽에 홀로 피어난 들꽃 한 송이를 어떻게 해서라도 꺾어오라며 생떼를 쓰는 철없는 연인처럼 지윤의 눈빛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만하면 됐어! 사람이 무슨 욕심이 그렇게 커? 저런 건 우리 같은 소시민이 넘볼 수 있는 게 아냐!”
"그런 썩어빠진 생각을 갖고 있는 당신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당신이 늘 그 모양이니까 우리가 지금껏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거라고!"
지윤은 금세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더니 온 아파트가 들썩일 정도로 요란하게 현관문을 닫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또 한동안 살얼음 위를 걷는 생활이 이어질 터였다. 신축아파트 실내등만 요란한 가운데 새벽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알람 소리를 듣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철민은 주섬주섬 옷을 차려입었다. 보통 사람 같았다면 퍽 관능적으로 보였을 지윤의 속옷 차림을 애써 외면했다. 그래도 아직까진 자신의 아내이기에 추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불을 턱밑에까지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그랬다. 철민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은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어쩌면 그 같은 행동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필요 이상의 배려를 한 건지도 모른다.
적당히 쌍꺼풀이 진 눈매, 살짝 치켜 올라가 항상 뭔가를 갈망하는 듯한 도톰한 입술, 세월에 짓이겨진 흔적이라고는 없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누가 봐도 구질구질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생활에 찌들어 모두가 시들어가는 데도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지 지윤은 그저 그렇게 세월에 저당 잡힌 것 같지도 않았다.
어느새 머리털이 한 움큼은 뜯겨 나가 버린 자신과 비교해 봐도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우아하게 나이 들어가는 지윤과 소탈하기 짝이 없어 세월의 각인이 그대로 찍혀버린 자신이 어울릴 리 만무했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되돌릴 수 없기에 그 잘못에 대한 대가는 그만큼 혹독한 것이리라. 철민은 위태로운 가운데에도 십오 년 가까이 유지해 온 그간의 결혼 생활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을 쏙 빼닮은 아이들을 봐서라도 이제 와 지윤과 갈라선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계기로든 두 사람이 가정을 꾸렸고 자식까지 낳았다면 그에 따르는 책임감은 벗어던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저 짝짓기 동물에 지나지 않는 처지라고 해도 지금 그들에게 남은 의무감이라면 그것이 전부일 터였다.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결코 소홀히 해선 안 되는 의무감 말이다.
죽을 만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처음부터 철민의 품속에 깃들려 하지 않았던 지윤은 철민에게 있어 영원한 평행선이나 다름없었다. 아내로서의 내조는 그렇다 치더라도, 분명 여자로서는 단 1점도 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늘 고리타분하게 사랑 타령만 하고 있었던 탓일까? 자신에게도 아내가 있고, 어느덧 무럭무럭 커 버린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철민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철민은 눈을 감았다. 과연 자신은 그동안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두 아이의 아빠로서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여자로서는 0점인 지윤만 탓할 순 없는 형편이었다. 철민 역시 어느 입장으로나 기여한 바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매겨 봐도 그에게 돌아올 점수 역시 0점밖에 없었다. 게다가 소 닭 보듯 하는 아이들의 모습만 봐도 그에게 주어진 점수는 합당한 결과라는 증거였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시작점에서의 어긋남과 순탄치 못한 과정들, 그리고 지금껏 얼기설기 흘러온 모든 결과물엔 결국 철민의 무관심과 무성의한 태도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 그로 인해 빚어진 얼룩들, 그 얼룩들에 지윤이 끼어들긴 했어도 그 모든 책임은 어쩌면 철민에게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돌아온 건 완벽한 따돌림이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한심하고 무기력한 이름뿐인 가장……. 분명 철민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는 말은 어디까지나 속담 사전에나 나올 법한 얘기였다. 반평생 살아온 철민으로서는 어딜 가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었다. 사림이 어쩌니 돈이 저쩌니 해도, 돈 나고 사람 난 게 인생이라는 걸 말이다. 그 말은 곧 돈이 없는 자는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기대할 수 없음을 뜻한다. 또 돈을 잃는 것은 사람들의 말처럼 조금 잃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돈을 잃는 것은 자신의 수족을 잘라내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돈을 잃는 것은 자신이 가진 전부를 잃는 것이다. 더러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건강은 살 수 없으니 건강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건강하기만 한 것이 삶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