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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18. 2024

아버지의 가방 끈

2024.10.18.

오늘의 문장 
이사를 앞두고 가구를 보러 다니는 중이다. 예산 안에서 원하는 물건을 고르는 일은 소풍 가서 먹을 간식을 고르는 어린 시절처럼 즐겁다. 그러다가 동네의 카펫 전문점에 갔을 때 겪은 일이다. 카펫의 색과 크기를 자세히 물어보려고 주인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가 속사포 같은 말투로 우다다다 쏘아붙여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한 간 정도면 되겠네요."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다.
"한 간이라면 사이즈가 어느 정도죠?"
질문하자, 아저씨는 내가 들고 있던 수첩에 '一間' 이라고 한자를 쓰더니, 업신여기듯이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한 간이 뭔지 모른다면, 중학교 다닐 때 제대로 공부를 안했다는 증거요."

*한 간 1.81818미터
<마스다 미리, 그런 날도 있다 中, p. 45 한 간 一間>




나의 이야기


오늘의 문장 글을 읽으면서 저 역시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아버지라는 의미는 그런 것 같습니다. 마냥 아버지를 기억하거나 기념할 때와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식으로서 그냥 아버지를 생각할 때는 가지지 못했던 생각들을, 이젠 어느새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처지에서 그 역할을 늘 되새겨야 하니까요.

5년 전에 위암으로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는 학력이 무척 짧았습니다. 국졸이셨습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형제가 많았던 저희 어머니 역시 국졸입니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저희 집에서 명색이 저는 대학원까지 나왔으니 엄청난 고학력자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는 단 한 번도 당신의 학력이 미미한 것에 대해 회한은 없어 보였습니다. 모르지요, 경상도 상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자식인 제게는 일부러 내비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항상 제게 하시던 말씀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가방 끈 길다고 잘 사는 건 아니다.

가방 무겁게 다닌다고 공부 잘하는 건 아니다.


한국전쟁이 터지던 해에 7살이셨던 아버지는 잠시 밖에 나가셨다가 피란민들의 인파에 휩쓸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곳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면서 길거리를 헤매던 중 트럭을 타고 지나가던 누군가가 아버지에게 손짓을 했습니다.

“내가 너거 엄마한테 데려다줄 테니 가자.”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에서 아버지는 무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더부살이를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를 데려간 분의 여동생은 지금까지 제게 고모할머니로 살아오셨고요.


원래 더부살이는 남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해주고 품삯을 받는 걸 말하는데,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보면 한 번도 품삯을 받은 적은 없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왔다고 합니다. 틈틈이 소여물을 먹여야 했고, 온갖 집안 청소를 비롯한 허드렛일은 아버지가 도맡아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 고행은 열 살도 채 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안 갈 일입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어쨌건 간에 학교까지 보내주고 그 오랜 세월을 키워줬으니 그만하면 된 것이다,라고 아버지는 오래된 과거를 회상하시면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돈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더부살이는 군대에서 제대한 뒤에 취직을 하던 순간까지 이어졌다고 했습니다. 스물일곱 살엔가 대구시 환경미화원(당시엔 그냥 청소부라고 불렀습니다)에 취업하자마자 대구로 나와 자취를 하셨고요. 물론 그때부터 아버지의 더부살이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은 환경미화원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당시에는 청소부라고 하면 무척 천시하던 직업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국민학교밖에 못 나온 내 주제에 이 만한 게 어디냐?”

근 30년 뒤 아버지는 중구청으로부터 장기근속의 공을 인정받아 환경미화원들을 관리하는 직책을 하나 맡으면서 청소 일에서 해방되셨습니다. 제가 보기엔 거의 유령 직책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지부장이라는 그 이름을 늘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어느 해인가 제게 그러더군요.

“올해 새로 들어오는 환경미화원 면접을 이번에 봤는데, 70프로가 대졸자더구나. 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지만,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졸자가 수두룩하단 말이야. 봐라, 가방 끈 길다고 반드시 잘되는 건 아니잖냐?”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제가 아버지에게 친부모님을 찾고 싶지 않냐고 여쭤 본 적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때 KBS 방송국에서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수년 동안 KBS 대구 방송국과 서울 방송국을 오고 가며 애타게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아버지는 제게, 낳은 정 못지않게 기른 은혜도 크다고 하셨습니다. 불가피하게 친부모와 떨어져 지내게 되었지만, 어쨌건 간에 그때껏 키워주신 양부모님을 친부모처럼 섬겨왔습니다. 당연히 지금까지 제사상엔 그분들이 오르고 있고요.


반백 년을 약간 넘어서는 동안 살아보니 지식과 지혜는 확연히 다른 차원의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지식적으로는 대학원을 졸업한 제가 국민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보다 훨씬 똑똑하고 유능하지만, 삶의 지혜는 아직도 당신의 발끝도 못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저도 저 위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뵙게 되면 그 오랜 세월 힘들게 살아오시느라 고생하셨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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