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자마자 휴대폰을 꺼내어 브런치스토리 앱을 열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몇 회차 글인지 표시하고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어떤 글감으로 글을 쓸지 정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매일 아침 그랬듯 지하철 역까지 걸어오는 동안에도 글감을 고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글감을 떠올리는 저 나름의 제한 시간을 한참 넘기고 말았습니다. 절반이 넘는 거리를 달려오는 동안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으레 이러면 휴대폰을 덮기 마련인데 오늘은 괜한 오기가 생기려 합니다.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 싶었던 모양입니다.
컴퓨터로 말하자면 깨끗이 리셋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이렇게도 해맑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머릿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장고 끝에 기어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깨끗한 판정패,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물고 늘어지기'라는 저만의 필살기가 남았습니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말한 '닥치고 그냥 쓰기'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입니다.
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휴대폰 키패드를 열심히 두드리며 빈 좌석에 앉았는데, 공교롭게도 건너편 옆좌석에 안면이 있는 사람이 앉았습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분입니다. 얼핏 보면 선생님 같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연수에 갔을 때 마주친 적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제가 관상을 볼 줄은 모르지만, 최소한 그녀는 공무원인 듯합니다.
제가 이 여자분을 얘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분명 안면이 있는 사람 같은데 누군지 생각이 안 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는 적당한 때에 기억이 떠올라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글감이 떠오르지 않던 조금 전처럼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사실 그녀는 올 3월부터 매일 기차에서 마주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걸 두고 그녀를 제가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것 하나 구별 못할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기차에서 매일 보는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뿐일까요? 대개 '아, 그 사람이네.' 하며 기억하기 마련인데, 여전히 제 머리는 그녀가 모르는 사람이란 결론을 도출해 냅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키패드에 눈을 돌리는 순간 다시 기억을 되짚어 보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그녀를 쳐다봅니다. 저의 눈과 그녀의 눈이 마주칩니다. 그렇게 머무른 시간이 약 1초, 허공에서 그녀의 눈과 제 눈이 엇갈립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녀를 조금 더 쳐다보고 있어도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먼저 돌렸으니 다시 저를 쳐다보기 전에 얼른 제 시선을 거둬야 합니다. 요즘은 단순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시쳇말로 제 이상형인가 싶어서 한 번 더 그녀를 봅니다. 커피숍에 마주 앉아 얘기를 해 보고 싶은 유형이긴 해도 이상형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제 신경을 건드리는 걸까요? 모르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기차에서 내려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녀는 칠곡군청 방향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