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디데이가 되었습니다. 많이 남았다고 생각할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기어이 이렇게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인생이 늘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많아 남아 있다고 마음을 놓고 있다 보면 어느새 훌쩍 그날이 오곤 했습니다. 시험을 앞둔 학부모의 입장에서도 이렇게 긴장되고 떨리는데 정작 본인은 어떠했을지 하는 생각을 하니 딸이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우리도 삼십 년도 훌쩍 더 된 그때에 시험을 쳤기에 그 마음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조금은 웃기는 게 고입 시험을 치던 장소는 기억이 나는데, 대입 시험을 치던 시험장이 어디였는지는 아무리 떠올려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유독 시험을 치던 때에 더 추웠던 기억만큼은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모교의 학생회에서 후배들이 나와 따뜻한 차를 타 주고 응원을 하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특히 중학교 때 수학을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이 직접 와서 일일이 자신에게서 배웠던 학생들을 쓰다듬던 그 촉감만은 여전히 새록새록합니다.
제가 시험을 쳤던 시험장은 집에서 꽤 멀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열 정거장은 넉넉히 가야 할 만큼 거리가 상당했습니다. 가는 내내 마음이 떨리고 긴장되었던 기억이 선합니다. 주요 과목의 요점 정리를 해놓은 작은 수첩을 손에 든 채 내내 뭔가를 중얼거린 듯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한 문제라도 더 맞히겠다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무슨 과목에서 몇 점을 받았는지, 가장 잘 친 과목과 못 친 과목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추운 날씨 못지않게 몸속을 파고드는 긴장감 때문에 하루종일 떨었던 기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딸이 시험을 치는 곳은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자동차로 7분 거리, 도보로 28분 거리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고작 1.8km 떨어진 곳입니다. 아무래도 시험장과 집이 가까우면 심리적으로 조금은 안정감이 들까요? 오죽하면 당일 컨디션에 따라 평소보다 시험 결과가 잘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할 정도이니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든다면 그만큼 다행스러운 일도 없을 겁니다.
아침 일찍 시험장으로 나선 딸은 벌써 국어와 수학 과목을 치르고 지금 한창 점심을 먹고 있는 중일 겁니다. 앞선 과목들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 같은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 문제는 무조건 맞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저나 제 아내도 그랬고, 3년 전에 먼저 수능 시험을 치른 아들 녀석도 그랬다고 하더군요. 아들도 점심시간에 식사를 제대로 못 한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긴 오늘 같은 날 배짱 좋게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은 생각이 들긴 합니다. 저 역시 그 오래전에 시험 당일 점심시간에 뭘 먹었는지, 먹기는 제대로 먹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고 표현하는 게 가장 알맞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나서도 몇 과목의 시험이 더 남아 있고, 그 과목들만 치르고 나면 자유의 몸이 된다는 사실에 더 들떴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소한 1~2년은 눌려 지내야 했고, 길게는 3~4년 이상의 중압감을 견뎌 온 처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막상 시험이 끝나고 난 후 그 많은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지만, 세상을 다 가진 듯 마음만은 가벼웠던 시간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부디 지금부터 딸에게 주어진 그 많은 자유시간을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는 지혜를 발휘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어엿이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상황입니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길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기를 바랄 뿐입니다. 원래 계획을 세우고 계획에 따라 생활하는 데에 익숙한 스타일입니다. 아마 별도로 제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시간을 잘 관리하며 생활해 나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몇 시간만 있으면 모든 시험이 끝납니다. 3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시간에 맞춰 시험장 앞에 가서 딸을 기다릴 것입니다. 멀리서 걸어 나오는 딸의 모습을 보며 만감이 교차할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나올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언제 저만큼 컸나 하며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시험 결과와는 상관없이 오늘 하루의 여유는 편히 즐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