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김 형사, 혹시 스토킹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닐까?"
"장 형사님! 가능성은 높아 보이는데 말이에요. 그렇다면 피해자가 이곳을 지나간다는 사실을 범인이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되잖아요. 아니면 한 번뿐만이 아니라 수시로 피해자가 여길 지나다녔어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고요. 그런데 굳이 이런 곳을 드나들 이유가 뭘까요?"
내친김에 관내에 접수된 스토킹 관련 신고 현황을 서에 문의했다. 몇 건 들어와 있긴 했는데, 어쨌건 간에 관련된 여성들은 모두 멀쩡히 생존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스토킹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실제로 스토킹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아직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일일 수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자리만 떠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형사 생활을 시작한 이래 지금처럼 이렇게 무기력감을 느낀 적이 언제였나 싶었다. 피해자의 시신은 저렇게 버젓이 드러났지만, 범인은커녕 피해자의 신원 자체도 밝혀내지 못한 상태였다. 살인 사건 수사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은 피해자의 신원 규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피해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내지 못했다. 생존의 얼굴을 최신 기술로 복원해 주변에 탐문해 봤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게다가 범행 현장을 목격했거나 행색이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 사건 현장 부근에서 서성이고 있는 모습을 본 사람도 없었다. 이런 상태라면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
"김 형사, 일단 오늘은 이만 가자고. 서에 돌아가서 우리가 뭘 빠뜨린 게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사위가 점점 어두워오고 있을 때였다. 풀숲에서 나와 신발 위에 신었던 비닐 덧신을 벗고 손을 털고 있던 그때 언덕 아래에서 사람의 형체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체격으로 보나 모양새로 봐선 아무래도 중고등학생 같아 보였다. 중고등학교는 사건 현장에서 각각 200미터와 600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주변의 환경이나 사건의 발생 등을 감안한다면 어지간히 간이 크지 않고서는 굳이 이곳을 지나갈 이유가 없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곧장 대로변으로 나가는 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 형사님! 저 학생, 우리한테 오는 것 같은데요."
성주가 봐도 분명 그렇게 보였다. 멀리서 봤을 때도 그랬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훨씬 더 왜소해 보이는 아이였다. 모르긴 몰라도 요즘 같으면 또래의 아이들에게 충분히 놀림감이 되거나 괴롭힘을 당할 만한 아이로 보였다.
"아저씨들 형사죠?"
"그래, 여긴 무슨 일이냐?"
"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혹시 우리 같은 고등학생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거두절미하고 훅 들어오는 녀석의 말에 성주는 움찔했다. 당돌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처음부터 성주가 세운 가설에 문제가 있었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이런 짓은 너희 같은 애송이들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야."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 건데요."
"뭐라고? 아니 이 녀석이……."
"형사님! 제가 이야기했다고 하지 마시고요. 우리 학교 2학년 윤광현이라는 놈을 조사해 보세요."
성주는 녀석이 만약 목격자라면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용의자가 될 만한 이름이 거론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임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는 하고 말하는 거야? 넌 지금 멀쩡한 한 아이를 범인으로 모는 거라고."
"아니면 그만이죠. 어차피 들리는 소문으로는 피해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목격자도 없다면서요. 그렇다면 지금으로선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할 필요가 있지 않아요?"
"네가 그건 어떻게 알아?"
"지금 우리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입만 열면 온통 사건 얘기뿐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광현이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종종 들리고 있고요."
누군가에게 두드려 맞기라도 한 듯 얼굴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멍자국이 있는 아이였다. 입술에는 벌써 피딱지까지 앉아 있는 상태였다.
"야, 이 녀석아. 네 얼굴을 보니 대충 짐작은 간다. 윤광현이라는 그 아이가 널 괴롭히는 모양이지. 그래서 괜히 우리한테 이러는 거 아냐?"
"아니에요. 우리 학교 아이들한테 물어보세요. 광현이가 얼마나 대단한 아이인지 말이에요. 요즘은 많이 잠잠해졌지만 말이에요."
그런 걸 형사의 촉이라고 해야 할까, 최근 들어 많이 잠잠해졌다는 말이 어쩐 일인지 석연치 않게 들렸다. 만약 녀석이 말한 광현이라는 그 아이가 범인이라고 가정한다면 잠시 움츠러들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폭풍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납작 엎드려 있는 셈이었다.
성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소한 미성년자가 벌인 짓이라는 선택지는 성주에겐 없던 것이었다.
"시끄럽다, 이 녀석아.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집에 가거라. 그리고 널 괴롭히는 놈들은 학교에 신고해. 계속 그렇게 맞고만 있을 게 아니라면 말이야."
"신고해도 소용없어요. 걔는 3학년 형들도 안 건드려요. 물론 선생님들도 그놈이 무슨 짓을 하든 못 본 척하고 있고요."
"뭐, 그 광현이라는 아이가 대통령 아들이라도 되냐?"
"모르셨어요? 저 건물 주인 아들이에요."
녀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새마을산업주식회사였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저 회사의 창업주인 윤 회장의 아들이라면 학교 학생은 물론이고 교사들도 못 건드린다는 말이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성주의 소식통에 의하면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군수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빌미를 만들어 반드시 인사를 하고 가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지간한 이익 단체의 감투라는 감투는 죄다 쓰고 있는 위인이기도 했다. 조금 더 과장하자면 윤 회장이 없으면 지역 전체의 일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야, 그만하고 얼른 집에 가. 네가 뭐 목격자라도 되냐? 뭐 본 거라도 있어?"
"제가 만약 뭔가를 봤다면 어떻게 되는데요?"
사건의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답답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이 아까운 시간에 고등학생이나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 좋다 이 녀석아. 도대체 뭘 봤는데?"
"아직은 얘기할 상황이 아닌 것 같아요. 아무튼 형사님들이 조사해 보고 나서 제 말을 믿을 수 있는 때가 오면 그때 제가 말씀드릴게요."
호통 아닌 호통을 쳐서 녀석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물론 녀석이 집으로 바로 갔는지 다른 곳으로 갔는지는 성주나 영석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때 그냥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를 두고두고 하게 되었다. 그날이 그 녀석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