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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Dec 03. 2024

누군가의 꿈

#1.

그저 꽤 오래된 이야기라고 해 두자. 시간을 거스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이런 이야기일수록 꼭 한 번은 되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서라벌 어느 한 자락에 김선종이라는 점잖고 학식 있기로 이름난 도령이 있었다흔히 말하는 신동의 경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문()이면 문()면 무그 어느 것 하나 빠지는 데가 없는 이였다게다가 선종은 뼈대 있기로 이름난 진골 귀족의 한 사람인 소판 김무림의 아들이기도 했다.

왕이 될 수 있는 신분이라 하여 최상의 권력을 휘두르곤 했던, 거드름 피우기로 유명한 그 잘난 성골들도 어떤 일이 생길 때면 선종에게 와서 자문을 구하곤 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렇게 가슴속 한편이 막힌 듯해 찾아오고 나면 선종을 대면한 뒤에 돌아갈 때는 늘 묵은 찌꺼기를 털어낼 수 있기 때문일 터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 어린 도령이 세상의 이치를 모두 꿰뚫은 듯 혜안을 갖추게 된 건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양이 있으면 음이 있는 법. 다행히 신분상의 서열이 다르지 않은 한 처자가 선종을 깊이 사모했다는 걸 꼭 말해 두어야 할 것 같다. 그 처자는 선종의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자는 선종을 가슴에 품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꼭 얼굴을 봐야 마음이 통하는 건 아니었다. 사방에 그의 넉넉한 인품이 풍겨 나오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으니, 규방에 홀로 앉아 있어도 처자는 선종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듯했다.

형식적인 인사조차 건네 본 적 없고 먼발치에서라도 그 뒤태를 단 한 번이라도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처자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선종을 몰래 흠모해야만 하는 자신의 서글픈 운명에도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상대의 의향이나마 물어본 일조차 없으니 최소한 그 정도는 자신이 감당해 내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처자는 그 어떤 불평불만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작정이었다그러다 언젠가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그가 알아줄 날이 올 거라 믿고 또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온 고을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일어났다. 시작은 극히 미약했으나 그 일은 어느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런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소문으로 전해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일대에 산산이 흩어져 있던 몇몇 고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명색이 고을의 수령이라는 자까지 찾아와 선종의 문간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 정도였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듯 몰려드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규방에 조용히 앉아 있던 처자에게도 느껴졌다.

“무슨 소리인가? 소판 어르신 댁 도련님이 출가를 한다니?”

가문의 대통을 이어받을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던 선종이 출가를 한다는 소식에 처자는 가슴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었다. 그저 평범해 마지않는 처자가 어찌 비범한 선종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처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그들은 이내 그것이 풍문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그래도 그들은 믿었다곧 명망 있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이야기를 꺼내면 선종이 결심을 되돌릴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다.

그런 믿음 때문인지 몇몇은 선종을 타일러 보기 시작했고, 아예 문중의 어른들은 그 어떤 일에도 호된 꾸중 한 번 들은 적 없던 선종에게 정색을 하며 다그치기까지 했다. 어떤 수단을 강구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비록 부(父)가 잉태했고 모(母)가 품어 자라나긴 했어도, 저 혼자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를 터득하고 자신을 다져 온 아이가 아니었던가? 결국 그의 결심을 꺾을 이는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님, 어머님! 소자 불가에 귀의하고자 합니다.”

단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그런 선종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을 부모도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바랑을 둘러멘 선종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대문을 나서며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종놈은 종놈대로 자신의 처지를 깊이 헤아려 주는 하나밖에 없는 도련님이 떠난다고 하니 그 마음을 달랠 여력이 없었고, 살아있다고는 하나 생이별이나 다름없는 자식의 출가 결심에 부모의 억장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장 먼저 냉정을 찾은 건 그의 아비였다.

“그래, 부디 더 큰 일에 네 한 몸이 쓰이기를 바라마.”

건강해야 한다는 말도 일러두지 않았다. 언제라도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라는 당부도 하지 않았다. 자식의 심지가 누구보다도 곧다는 걸이 길로 한 번 가면 죽은 목숨이 아니고서야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거라는 걸 부모인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체통도 체통이거니와 그래도 한 집안의 가장된 아비는 꿋꿋이 슬픔을 감출 수 있었다고 하지만, 어미 된 이의 심정은 그렇게까지 야박하게 굴 수는 없었으리라. 연신 옷고름에 눈물을 찍어내다 기왕 마음먹었으니 어서 가라며, 행여 미련에 뒷덜미라도 잡힐까 싶어 뒤도 보지 말고 가라는 손사랫짓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대문을 나서 긴 한숨을 쉬었을 즈음 선종은 비로소 마을 입구를 지나쳤음을 알게 되었다별로 든 것도 없는 바랑이 자꾸만 아래로 쳐지는 걸 보면아직도 어딘가에 털어내지 못한 응어리가 남았나 싶기도 했다작은 오솔길로 접어들어 야트막한 언덕에 발을 내디뎠다내친김에 눈앞에 놓인 저 고개는 넘어가야자칫하면 약해지기 마련인 마음을 눌러 앉힐 수 있겠기에 선종은 앞만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아직도 그의 귀엔 여기저기에서 눈물짓는 소리가 들렸다언제까지나 그렇게 하고 있기라도 할 듯 손을 흔들고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그들이 뿜어내는 바람결에 떠밀려 선종은 재를 넘어섰다이제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 정겨운 마을도 더는 보이지 않으리라.

선종은 잠시 멈춰 선 채 옷소매로 땀을 훔치며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기억에 아로새길 만한 유년의 추억 따위는 없었다고 해도 십수 년 나고 자란 곳이었다. 이젠 속인으로선 이 세상을 하직해야 될 때가 왔음을 알았다.     

저 멀리 시야가 가 닿기 어려운,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앉은 어느 집 문간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아무리 세상의 정욕과 물질을 하찮게 여기며 살아왔다고 한들 여인 하나의 마음마저 몰랐을 리는 없었다. 선종은 그가 다름 아닌 자신을 사모해 온 처자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처음부터 그랬듯 이리 떠난다고 별다른 전갈을 넣어 둘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기약 없는 약조를 그에게 두고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간 고마웠소. 언젠가 또 인연이 되면 볼 날이 있지 않겠나 싶구려!”

선종은 어쩌면 들어서도 안 되고 들리지도 않을 혼자만의 말을 발걸음 아래 짓눌러 놓아야 했다.          

[ 각주 ]
김선종: 이 작품에 나오는 김선종, 즉 자장율사의 모습을 설명하는 데 있어, 통도사 창건 설화와 관련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작가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 둔다.
소판: 신라 골품제에 따른 17 관등 가운데 3등급에 해당하는 관직의 이름으로 잡찬 또는 잡판이라고도 하며,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관등으로서 공복의 색깔은 자색이었다.
속인: 불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불교에 귀의하지 않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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