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사람은 가는 사람이고 남아 있는 사람은 어찌 되었든 자신의 앞길을 헤쳐 나아가야 하는 게 인생의 정한 이치이던가? 선종이 떠나고 나서 얼마 못 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마을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에 바빴다.
다만 자식이라는 커다란 숙명을 가슴속에서 떼어 낸 부모는 쉬이 그 미련을 털어내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그건 처자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동구 밖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한 번 그렇게 나선 길을 되짚어 돌아올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처자는 바람이라도 여느 날과 다르게 들이치는 날엔 행여 임 소식이라도 있을까 싶어 가슴을 태우기도 했다.
그러던 처자는 언제부터인가 선종이 들춰보기라도 했다는 서책이라는 서책은 죄다 구해 펼쳐 들었다. 여자가 무슨 공부를 하느냐는 엄한부모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겨우 제 이름 석 자 정도만 알고 있던 처자는,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통증에도 서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언젠가는 선종과 웃으며 인생을 이야기할 날이 올 거라 믿으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서책에 머리를 깊이 박은 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마치 깊은 산중에 은거한 처사가 부지불식 중에 득도하듯, 수년이 흘러 처자는 거짓말처럼 세상의 모든 이치를 터득하게 되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늘 선종과 한 자리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 것도 그때부터였다.
아마도 그래서였을까? 선종이 마을을 떠나고도 무려 서른 해 남짓 흐른 어느 날, 처자는 선종이 한 번은 자신을 찾아올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 많은 여생을 일각처럼 느끼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 온 그녀였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생애를 볼 때 그 같은 시간은 한낱 한나절 뙤약볕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과년하다 못해 이제는 넉넉히 늙어 버린 딸년이 어느 집 대문에 들지도 않은 채 수절과부나 다름없이 생을 허비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부모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제겐 마음으로 정혼한 이가 있사옵니다. 그 사람을 버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글쎄, 그게 어디 사는 누구냐니까? 이름이라도 말해다오. 이대로 널 늙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으냐?”
소문으로만 무성한 이야기를, 그래서 어쩌면 자식의 창창한 앞길이 막히고도 남을 그 이야기를 처자의 부모는 차마 꺼낼 수 없었다. 들은 바도 있고 짐작 가는 데도 없진 않으나, 자식의 입에서 직접 듣지 않고서야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은 게 그들의 심정이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찾아오고 떠나감을 사람보다 들판이 먼저 알려주었다. 강남 갔던 제비도 돌아왔다 다시 날아가기를 몇 차례……. 어느 곳에 편안히 정좌해 불도를 닦고 있던 선종이 채비를 갖추고 자신에게 오고 있음을 처자는 감지했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만리 밖을 내다보는 듯했다.
처자는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이 무색할 만큼 단아한 모습으로 그를 기다렸다. 백옥 같은 살결엔 어느새 주름이 졌지만 그까짓 육신에 눈길을 둘 그가 아니었다. 처자 또한 그런 것 따위에 미련을 두지도 않았다. 희끗희끗 고개를 내민 흰머리도처자에겐의미가 없었다. 어쩌면 이생에서는 단 한 번의 만남뿐이리라. 처자는 그것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었다.
반가운 손님이 들 때엔 까치가 먼저 울어댄다더니 유별나게 까치들이 마을 주변을 배회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 이상은 청명할 수 없을 만큼 높아진 하늘을 쳐다보던 처자는 뭔가가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몇 번이나 눈을 씻고 봐도 틀림없었다. 처자는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기린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길조 중의 길조라고 믿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동물이었다.
서너 식경이 지났을 즈음, 동구 밖 저 먼발치에서 주장자 하나 짚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갈 큰 절을 창건했던 그의 위엄이 발걸음 하나하나에 아로새겨졌다. 선종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이 죽고 없는 지금 그래도 처자는 그가 바로 그때의 도령이었음을 한눈에 알아본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구려! 그 세월의 흐름도 우릴 비껴갈 수는 없었나 보오.”
이젠 어엿한 노승의 기운이 서린 그가 서너 발짝 앞에 선 처자를 바라보았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말없이 이리 찾아올 것을 처자가 먼저 알고 있었고 그 사실 역시 노승 또한 알고 있었다는 듯, 두 사람 사이엔 그 어떤 언어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눈빛으로 말을 주고받았고, 이제는 한가득 늘어난 이마의 주름살로 서로에게 끄덕여 주기만 하면 되었다.
“이걸 꼭 잘 간직해 주었으면 하오! 혹 이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이 되더라도 말이오. 누구에게도 쉽게 맡길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리 찾아온 것이니…….”
“네. 염려 마셔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지켜내겠나이다.”
이제 다시 노승을 보내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 한가득 담긴 그 아쉬움이야 두말해서 무엇 하리.
“언제 다시 뵈올 수 있을까요?”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는 그리 될 날이 오겠지요. 이생에서 안 된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노승은 말을 마치자마자 또 그렇게 홀연히 사라졌다.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하고 떠나는 노승을 처자는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처자는 가까운 곳에서 그를 배웅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십 년을 기다려 온 고단함이 단번에 씻겨 내리는 듯했다.
처자는 노승이 가져다준 물건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세를 고쳐 잡고 방석 위에 앉으려는데 뭔가가 배기는 듯해 아래에 손을 넣어 보았다. 간밤에 읽던 서책 한 권이었다. 이제는 닳고 닳아 금방이라도 산산이 바스러질 듯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문득 엉덩이에 박힌 세 개의 점이 만져졌다. 그저 어미에게 그렇게 생겼다는 말만 들었고, 가끔 손으로 만져 보면 우툴두툴한 듯 만져지는 느낌만으로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붓으로 한 획을 그리면 정확하게 한 일 자가 될 것 같이 생긴 그런 점들이란다.”
캄캄한 세상에 한 귀인이 홀로 불을 밝히며 다가와 처자의 어미에게 나무토막 세 개를 건네주던 꿈을 꾸고 태어났다는 그녀, 그때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 점들은 처자와 함께 했다.
어째서 그런 점들이 생겨났는지 처자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껏 그 점들 때문에 잔병치레 한 번 한 적 없었으니사는 데 있어 불편함은 없었던 셈이었다. 행여 그것들이 복을 부르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봐도, 지나온 세월이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 각주 ]
기린: 털은 오색이고 이마에 뿔이 하나 돋아 있으며,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말과 같은 발굽과 갈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상상의 동물로, 예로부터 용·거북·봉황 등과 함께 상서로운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원래 기린은 날지 못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작품에선 이야기의 흥미와 구성의 필요성으로 인해 기린에게 '날 수 있는 속성'을 임의로 부여했음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