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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Dec 06. 2024

누군가의 꿈

#3.

근자에 이르러 온몸에 신열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마를 짚어 보고 겨드랑이나 목을 만져 봐도 막상 몸에선 미열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처자는 가장 이치에 닿을 만한 결론을 내렸다. 바로 그 세 개의 점들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 가끔은 마치 그것들이 몸에서 패어 나갈 듯 쓰라리기도 했다는 게 그 증거이리라.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면서 점점 자신의 몸에서 이탈되려는 그 느낌이 어쩌면 이 세상을 하직할 때가 되었다는 뜻일 거라 짐작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노승이 다녀간 뒤 비로소 처자의 궁금증은 풀렸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어미가 꿈에서 누군가로부터 받았다던 그 나무토막의 의미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자는 노승이 맡기고 간 정체불명의 물건을 불빛에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은행나무를 잘 다지고 깎아 만든 한 마리의 용이 아로새겨진 목조상이었다. 처자가 받은 것은 하나였지만 마치 그것과 닮은 것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만약 꿈을 생각한다면 이것과 똑같은 것이 세상 어딘가에 두 개는 더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것의 쓰임새를 여쭤보지 않았구나!’

꼭 언어로 이루어져야 뜻이 통하는 것만은 아닐 터였다. 잘 간직하라 했다.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부디 잘 살피라고 당부를 잊지 않던 물건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더는 의구심을 가질 이유도 없는 일이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허공을 뚫고 무심히 한 줄기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부엌에선 몸종으로 부리고 있는 삼월이 저녁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을 터였다. 엄연히 자신은 출가하지도 않은 과년한 주제에, 그 긴 세월을 흠모해 온 정인이 있다며 버텨왔던 불효막심한 딸년이었다. 멍석말이라도 하지 않은 게 다행인 줄 알라며 처자를 내쳤던 아비의 눈은 지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형편에 삼월은, 그래도 혼자서 살아가려면 거동이 불편할 테니 데려가 말동무도 하고 도움이라도 받으라며 야밤에 어미가 아비 몰래 딸려 보낸 아이였다. 하긴 이젠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니 아이라고 할 수도 없으리라.


문이 열리고 이내 저녁상이 들어왔다. 상이라고 해봤자 밥 한 그릇에 국 한 사발, 그리고 두어 가지 찬이 전부였다.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진수성찬을 기대해 본 적은 없었지만, 어쩐 일인지 날이 갈수록 서글픈 생각이 들 때도 있긴 했다. 처자는 상을 방 한가운데 놓아두고 뒷걸음질로 나가려던 삼월을 불러 앉혔다.

“삼월아! 그동안 내 몸 하나 건사하느라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아씨!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고 그러셔요? 어디 멀리 떠나시기라도 할 것처럼…….”

사람 일이라는 게 기약할 수 없지 않느냐는 처자의 말에 삼월은 행여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라 했다. 처자는 노승이 건네고 간 물건을 삼월이 잘 볼 수 있도록 상 위에 올려놓았다.

“언제가 되었든 나 죽으면 이 물건을 꼭 내 무덤 속에 함께 묻어 다오!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느냐?”

함께 해 온 시간 내내 허튼 말이라고는 내뱉는 법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삼월은 이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역할 것인가? 도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무덤에까지 가져가려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기꺼이 그렇게 해 드리겠다며, 그러니 아무 염려 마시라는 말을 올린 삼월은 방을 나왔다.


또다시 몇 번의 계절이 더 흘러갔다. 삼단처럼 길게 늘어뜨려진 머릿결을 매만지며 앉아 있던 어느 날 아침, 처자는 가슴 한편에 묵직한 돌 하나가 얹히는 것 같았다. 가슴이 먹먹하더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처자는 방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아! 이리도 하늘이 청명하기만 한 날에…….’

보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노승이 입적했음을 처자는 느낄 수 있었다. 속인도 아닌 그의 임종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 따위는 가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날이 그리 멀지도 않았다. 이젠 자신의 차례였다.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해야 처자는 머리를 매만져 틀어 올린 후 비녀를 꽂았다. 그 어떤 누구에게도 손목 한 번 잡혀 본 적 없던 그녀였다.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한 처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녘의 어딘가쯤을 향해 몸을 돌려 절을 올리던 처자는 두 번째 절을 하던 순간 좀처럼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단 한 번의 만남 때도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지금껏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눈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는 없으리라.

‘기다리시옵소서! 저도 곧 가겠나이다!’

그날 아침을 시작으로 처자는 식음을 전폐했다. 몇 번 상을 차려 들락날락했던 삼월도 제 주인의 결연한 의지를 잘 아는지라 더 이상 권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어느 날, 처자는 삼경에 이르기 전 곱게 목욕재계하고 잘 다려놓은 저고리와 치마 한 벌을 갖춰 입었다. 마치 기약이라도 한 듯 손도 대지 않은 저녁상을 물리자마자 자리에 고이 누웠다. 노승이 주고 갔던 용 목조상을 쥔 두 손을 가지런히 배 앞에 모았다.

처자는 온몸이 나른해지며 한편으로는 평안해짐을 느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막막한 가운데에도 처자는 육신에서 뭔가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천장과 벽의 경계가 모호한 어느 지점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생경한 그 느낌 속에서도 처자는 손에 꼭 쥔 용 목조상을 몇 번이고 확인해야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는 하늘을 날아가는 것일 터였다. 아니 누군가에게 이끌려 가고 있을 테지만, 발걸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땅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리라. 그러면서 처자는,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을 저 먼 곳 어딘가에 자신의 정인이 맡긴 물건을 숨겨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게 자신에게 주어진 그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약속이란 걸 불현듯 깨달았다.


언젠가 세월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기억이 다다를 저 먼 끝 어딘가에 닿을 때쯤이면, 어떤 형태로든 딱 한 번은 더 노승을 만나게 되리라는 걸 예감하며 처자는 눈을 감았다. 두 번 다시 이 힘겨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 각주 ]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불교와 유교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나무로써,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심어왔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다만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것은 경기도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라고 하는데 그 수령이 무려 1,100년이 넘는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고려 시대 이전에 승려들이 중국에서 씨를 가져와 절 근처에 심은 것이 전국으로 퍼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여기에선 그보다 더 오래 전인, 통도사가 창건되던 646년(선덕왕 15년)에 이미 은행나무가 있었다고 가정해 보았다.

삼경: 하룻밤을 다섯으로 나눈 세 번째의 시각으로 밤 열한 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의 시간에 해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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