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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Dec 07. 2024

누군가의 꿈

#4.

서둘러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상대는 벌써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 어떻게 손 쓸 도리는 없었다. 일단은 사태의 추이만을 지켜볼 뿐이었다.

멀리 산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노인은 조금 더 힘을 내 보기로 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세월인가?

‘저기만 넘어가면…….’

이제 슬슬 그 아이에게로 가 볼 때가 된 것 같았다. 그새 이십오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노인은 기다렸다. 아이가 자라나기를, 그래서 그 아이가 이 일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때가 되기를……. 그렇게 기다린 시간들은 갑자를 무려 스물네 바퀴난 돈 것과 얼추 비슷했지만, 그것 역시 세월이라고까지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껏 노인이 살아온 날들에 비하면 모래사장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 하나쯤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러는 동안 물론 상대도 가만히 있진 않았을 테다.

그들 역시 필요한 모든 수순을 차곡차곡 밟아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지켜냈어야 할 것들 중에서 벌써 하나는 그들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 또 다른 하나도 조만간 그들이 가지게 될 터였다. 그런 걸 인과 연이라고 해야 할까? 그건 노인이 아무리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모든 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어떻게든 마지막 하나는 지켜내야 한다. 그것마저 빼앗기고 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초래되고 만다. 아마도 그것은 이미 천사백 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간 때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을 테다.

지키려는 자가 있었고 가지려는 자가 있었다. 어쩌면 두쪽 다 실패한 셈이나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그 막중한 임무는 전혀 뜻밖의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다시 지켜야 할 자와 가져야 할 자가 만나는 데 천사백 여 년이 흘렀다.

생각보다 상황은 심각한 편이었다. 그래도 노인은 서두르지 않기로 작정했다. 무슨 일이든 바늘허리에 실 매어 못 쓴다고 했다.

어딘가로 떼를 지어 날아가던 한 무리의 새들이 노인을 보자마자 놀란 듯 흩어졌다가 다시 대오를 이루었다. 지나온 길을 고스란히 거슬러 가는 힘찬 날갯짓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노인은 어느새 고갯마루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참 전부터 노인은 그저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수량이 급격히 늘어나 있었다. 알게 모르게 부풀어 오르는 뜨거운 주전자 속의 물처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언젠가는 저 튼튼한 다리마저 잠기고 말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일대는 물바다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 멀쩡한 하늘에 그와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흔한 여름날 중 비 많이 오는 며칠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될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마을이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그와 같은 일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그렇게 안일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다. 하기야 뭐든 맞닥뜨리고 나서야 걱정하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란 걸 노인은 충분히 겪어왔다. 안타까운 일이긴 해도 고작 그런 사사로운 일 따위에 눈을 돌릴 때가 아니었다.

얼마간 노인이 지켜본 바로는 여기저기서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알 법도 한데, 그저 인간이라는 족속들은 늘 그래왔다. 지대가 낮은 지역이 물에 잠겨 적지 않은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막대한 재산상 손실을 입은 게 불과 한 달 전이었다. 온 나라가 긴급 복구를 한다느니, 수재민 돕기 성금 모금을 한다느니 하며 요란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더 이상의 복구 작업은 진전되지 않았다. 게다가 다시금 물난리가 일어나도 또 으레 찾아오는 홍수에 다름 아니려니 생각하며 태무심할 뿐이었다. 아마도 머지않아 큰 난리가 일어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종종 근처에서 서성대는, 신문사에서 취재 나온 듯한 사람들을 붙잡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도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실을 말한다 한들 그들이 곧이곧대로 믿기나 할 것인가?


주민들의 식수원인 낙동강 오염 사태 악화! 중금속 비소와 수은의 기준 초과 검출! 대책 마련 시급!


연일 신문에선 이 문제로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꽤 무거워 보이는 카메라와 장비를 어깨에 짊어진 두 사람이 보였고, 그들에게서 서너 발짝 떨어진 곳에 마이크를 든 채 다리 위에 선 여자도 있었다. 이들 역시 요란한 소리를 일으키며 아래로 지나가는 저 흙빛의 강물을 보면서도 언젠가는 저 강물이 저들을 집어삼킬 거라고는 짐작도 못 하는 듯했다.

그들은 뭔가를 적은 듯한 종이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몇 번이나 읽어보더니 서로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마이크를 들고 있던 남자가 카메라 쪽을 바라보며 얼마간 연습했던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원인을 알 수 없는 낙동강 오염 사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은, 시안, 유기인화합물, 폴리염화비페닐 등의 불검출을 원칙으로 하는 우리나라 식수원수의 기준에도 불구하고,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비소와 수은의 검출량이 각각 미국해양대기관리청 기준인 8.2mg/㎏과 0.15mg/㎏을 크게 상회하는 37.5mg/㎏과 7mg/㎏이 각각 검출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식수원에선 절대 검출되어선 안 되는 시안도 2mg/㎏이나 검출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국토해양부와 학계 및 각 연구기관에서 다각도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현재까지로 봐선 그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합니다. 한편 식수 음용에 따른 구체적인 피해 상황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탁해져 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인근 주민들 사이에선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에 전문가들은 주민들에게 반드시 물을 끓여 마실 것과 장시간 받아 둔 물을 그냥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당부를 주었습니다. 아울러 하루속히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면서 입을 모으고…….”

촬영을 마친 사람들이 자리를 뜨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었다.

‘대책 마련이라?’

참 우습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비소니 수은이니 하는 것들이 중금속들이라는 것, 그래서 인간의 몸속에 축적되면 치명적이라는 것 정도는 노인도 모르지 않았지만, 그게 절대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건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엔 과학의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우르릉 하며 조금씩 불어나는 강물을 뒤로한 채 노인은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움직였다.


저 멀리 아래에 까만 점으로 보이는 집 한 채가 시야에 들어왔다. 얼핏 보면 이 집이 저 집 같고 저 집이 이 집 같았지만 이십여 년 전에 와 본 기억을 잊을 리 만무했다. 설령 길을 잃어버렸다 해도 걱정할 계제는 아니었다.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노인을 이끌어 준 표식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새 얼마나 컸을까?’

노인은 이제 웬만큼 준비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며칠 후면 저 가냘팠던 아이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거뜬히 지고 묵묵히 그 길을 가게 될 터였다. 그 오랜 세월을 기다렸는데 고작 며칠이 대수일까?

[ 각주 ]
 
시안: 무색의 기체로 특유한 냄새와 독성이 있는 시안화수소산화합물의 주성분을 이루고 있는 물질로서 흔히 청산가리라고 알려진 시안화칼륨 등이 있다.
 
폴리염화비페닐: 흔히 PCB로 표기하며 체내에서 강력한 발암작용과 기형아 출산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화합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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