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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Dec 08. 2024

누군가의 꿈

#5.

기다란 골목길을 지나 노인은 대문 앞에 섰다유달리 빗물에 부식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철제 대문이었다대문의 밑동은 작은 개나 고양이쯤은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부서져 너덜거리고 있었다세월의 흔적이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한참 전부터 그 아이가 대청마루에 나와서 밖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지금으로선 더는 아이라고 불러서도 안 될 것 같았다. 그새 참 많이 자랐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 여인을 처음 본 것이 아마도 갓 태어났을 때였던 걸로 기억되었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유별나게 울음을 그치지 않았던 그때의 그 아이는 노인의 손길을 느끼고선 잠이 들기까지 했다.

기를 불어넣었으니 그때의 손길과 만남의 흔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그때 보았었던 아이의 엄마도 중년의 그늘을 지나 이젠 어엿한 초로의 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잘 있는 걸 봤으니 마음이 놓였다. 저렇게도 흠 없이 자란 걸 보니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왔던 일들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청신호를 보는 듯했다. 아주 작은 문제가 남아 있긴 했다. 어떻게 저 여인에게 접근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점은 그다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테다. 몇 가지 일들이 저 여인에게 일어나고 나면 다소간의 의구심은 남더라도 노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올 테니까 말이다.


노인은 얼마 뒤 다시 찾아오리라 생각하고는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노인은 몇 개의 산을 넘어가야 했다.

노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적어도 반경 이백여 미터 안에선 사람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다. 딱 한 번 웅크렸다가 노인은 기지개를 켜듯 몸을 활짝 폈다. 몇 번의 몸짓, 이내 노인의 주변에 바람이 몰려들었다가 빠져나갔다.

나이와는 무관하게 튼튼한 두 다리로 버티고 섰는가 싶더니 힘차게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노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넘어갔다. 벌써 날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데 아직도 서쪽 산에 걸린 해가 버둥거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누군가가 한참 전부터 집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냥 어슬렁거리기만 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무례한 그 불청객은 아예 대놓고 집안을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요즘 동네 주변에 좀도둑이 들끓어 신경이 곤두선다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저 노인은 누구지?’

다행스럽게도 험상궂게 생긴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얼핏 행색만 봐도 족히 칠팔십은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그만한 기력도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성희는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던 엄마에게 몇 번이나 말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런 성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엄마가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큰 소리로 말을 건넸다.

“왜, 나한테 할 말 있니?”

말소리가 들리자마자 반쯤 열린 대문 틈으로 잠깐 눈이 마주친 노인이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겉모습에 비해 무척 동작이 날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뇨, 엄마. 없어요.”

유달리 높은 담 때문인지 이번엔 대청마루에 서서 까치발을 딛고 열심히 노인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부엌에서 또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희야! 아빠가 지갑을 놔두고 가셔서 아무래도 네가 갖다 드려야겠구나. 네거리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좀 다녀와.”

요란한 철제 대문 소리를 뒤로 한 채 성희는 집을 나섰다.


두툼한 지갑을 호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은 채 기다란 골목길을 잽싸게 빠져나와 대로로 들어섰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지친 발걸음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무수히 많은 버스들이 정류장에 잠시 섰다가 다시 출발했다. 익숙한 풍경들이었다. 근처 어느 음식점에선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때마침 몹시 배가 고프단 생각이 들려는 찰나였다.

무심코 들여다본 길 건너 작은 골목길 입구에 조금 전에 보았던 노인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분명 노인은 뚫어지게 성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거기까지 가서 물어볼 마음까진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신문이나 TV 뉴스에서 보도되는 강력범죄 사건들 때문인지 성희는 주변을 둘러보며 길을 걸어야 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얼른 발걸음을 재촉하여 경찰서 앞에 도착하니 아직 시간이 한창 이른데도 코가 빨개져 있는 아빠가 걸어왔다.

“오늘 학교는 잘 갔다 왔냐?”

늘 하던 대로 별다른 대꾸 없이 성희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 자식이! 아빠가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고개만 까딱하냐?”

여전히 십 년도 훨씬 이전에 초등학교를 다니던 딸로 생각하는지 아빠는 틈만 나면 성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래도 그만하면 천만다행이었다. 나이가 벌써 스물다섯을 넘기고 있었어도 아직도 아빠에게 쥐어박혀야 할 정도로 성희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은 건가 싶었다. 게다가 어엿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가 되어 있다는 건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았다. 저만치 멀어지는 아빠의 뒷모습, 고개를 약간 떨어뜨리고 힘없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몹시도 힘들어 보였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빠른 속도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직은 이 정도까지 어두워질 리가 없을 텐데 하는 생각에 성희는 고개를 뒤로 힘껏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 저건 도대체 뭐지?’

순식간에 두려운 마음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마에선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있었고, 어서 도망이라도 쳐야 할 것 같은 상황처럼 느껴졌다. 마음은 금세라도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으나 두 다리가 심하게 후들거리기만 할 뿐,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족히 사람의 네다섯 배쯤은 되어 보이는 심상치 않은 동물이 성희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성희의 주변을 한참 동안 맴돌았다.

아무리 봐도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짐승이었다. 날개를 펼쳐 상공을 몇 바퀴 날아다니는 걸 보면 분명히 새의 모습이긴 했지만, 새라고 딱 집어 말하기도 어려웠다.

성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저렇게 큰 새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아마 살아 있다면 익룡이 꼭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막무가내로 덤벼들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무작정 도망간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성희는 요모조모 그 짐승을 뜯어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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