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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Dec 12. 2024

누군가의 꿈

#7.

이젠 아예 수저를 다시 집어 드는 일 따위엔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어느새 바로 코앞에까지 다가앉은 엄마가 성희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무릎에 얹은 손이 살짝 떨리는 걸로 봐서 엄마는 뭔가 이야기를 꺼낼 태세로 보였다.

“새라고? 어떻게 생겼던?”

“내 덩치의 다섯 배는 되어 보였어요. 뭐랄까, 온갖 동물들이 잡동사니로 섞인 그런 괴상망측한 짐승이었어요. 어찌 보면 소, 사슴, 독수리 같았어요. 아니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내가 본 게 어쩌면 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머리에 뿔도 하나 달린 게 한참 동안 머리 위를 날아다니다 사라졌어요.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건 같은 곳을 지나던 그 많은 사람들의 눈엔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동안은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었어요.”

온갖 걱정거리가 가득한 표정을 한 엄마의 미간에 주름이 두어 가닥 잡혔다. 뭔가를 결심한 듯 엄마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새 내가 널 낳기 전에도 꿈에서 봤었어.”

“정말요?”

“그래, 그런데 꿈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생생했어. 나중엔 정말 그런 새가 있는지 여기저기를 찾아보기까지 했으니까.”

엄마의 설명은 이랬다. 그 새는 이름이 기린이라고 했다. 네 다리로 달릴 때는 단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고,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했다. 또 천 년이나 살 수 있는 동물이므로, 옛날 사람들은 장차 위대한 일을 할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걸 알려주기 위해 나타나는 새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슬만 먹고 산다는 그 기린을 보면 항상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어 왔단다.

“그럼, 상상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새잖아요?”

꿈에서 엄마가 본 기린과, 조금 전에 성희가 본 기린의 모습이 일치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분명히 눈앞에 나타난 기린이, 왜 성희의 눈에만 보였는지 그것 역시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저녁상을 치우자마자 졸음이 밀려왔다. 아빠와 엄마가 저녁 뉴스를 보고 있는 사이, 성희는 촉감이 좋은 쿠션을 껴안은 채 벽에 느슨하게 기대어 있었다. 앵커의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가 점점 멀어졌다. 이내 리모컨으로 TV를 끄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부스럭대며 자리를 옮기는 것 같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잔뜩 소리를 죽인 채 먼저 말을 꺼내기 시작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여보, 그 노인이 다시 온 것 같아요.”

'노인? 혹시 아까 만났던 그 영감님을 말하는 거 아닐까?’

어쩐지 이번에는 뭔가를 꼭 알아낼 것 같아 성희는 쥐 죽은 듯이 자는 척했다.

“노인이라니, 누구 말이야?”

“왜, 있잖아요? 성희가 태어나던 해에 찾아와서 아이의 운명이 어쩌고 저쩌고 했던 노인 말이에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듯 잠자코 있던 아빠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미친 영감쟁이 말이야? 그런데 그 영감 그때 괜한 헛소리 했던 거 아닐까?”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요. 기억 안 나요? 성희가 크는 동안 일어날 몇 가지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게 다 들어맞았잖아요. 그리고 성윤이 얘기도…….”

성윤은 아주 어릴 적 기억에만 남아 있던 성희의 오빠였다. 성희가 채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집을 나갔으니 기억에 없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그때 우리 성윤이가 그렇게 없어질 것을 알았다면 반대로 어떻게 하면 잃어버리지 않을지도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 난 지금 생각해도 우리가 그때 왜 그걸 못 물어봤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땐 사실 우리가 긴가민가했었잖아요. 그냥 웬 정신 나간 노인인 줄 알았으니까요.”

엄마는 오래전 과거의 일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성희가 태어나고 1년쯤 접어들던 무렵 장염에 걸려 죽을 뻔했던 일, 여섯 살 때 시장에서 엄마의 손을 놓쳐 파출소까지 가서 아빠가 성희를 찾아왔던 일,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캠프 갔다가 물에 빠져 죽다가 살아난 일 등…….

그러고 보니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듯했던 그 일들이 성희에게 새삼스레 다시금 떠올랐다. 그곳이 어디였는지 뚜렷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사람들이 북적대는 시장에 갔다가 엄마를 놓치고 하루 온종일을 울다가 어떤 파출소에 가 있었던 일, 많이 무서웠고 슬퍼서 오들오들 떨다가 저녁 늦게 되어서야 부리나케 달려온 아빠의 등에 업혀 잠이 든 채 집으로 돌아왔던 그 일이 생각났다. 물론 스카우트 캠프 갔다가 익사할 뻔했던 일도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그때 그 노인이 성희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거라고 말했잖아요? 당신도 기억나죠?”

성희의 짐작이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다. 그 노인은 성희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희는 노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도대체 그 영감님의 정체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성희는 밀려드는 궁금증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지금으로 봐선 엄마나 아빠에게 묻는다 해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할 것 같았다.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엄마는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노인이 말한 그때가 정말 되었나 봐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때라니?”

가만히 들어보니 엄마도 노인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때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말이다.

“당신, 내 태몽에 나왔던 그 이상한 새 기억나요? 왜, 당신이 듣고는 그건 짐승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했던 그 새 말이에요.”

“그래, 기억이 나. 그런데, 그 새가 왜?”

이제 이 집에서 기린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셈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빠 역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조금 전 성희가 당신에게 지갑을 갖다주고 오는 길에 그 새를 봤대요.”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듯 발끈하는 아빠의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아빠의 큰 덩치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거 상상 속의 동물 아냐? 정말 성희가 그걸 봤단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에요. 난데없이 성희가 새 얘기를 꺼낸 것도 그렇고, 그것도 직접 봤다며 생김새를 말하는데, 꿈에 나타났던 새의 모습과 똑같은 것까지……. 아무튼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어요.”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이 벽시계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온 집안이 고요한 가운데 성희는 슬슬 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문득 어릴 적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오늘 새삼 보니 그새 이만큼 컸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군. 올망졸망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어른이 되고 말았다니…….”

지난 세월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엄마가 연신 머리를 쓰다듬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성희는 그렇지 않아도 밀려드는 잠을 더 참기가 힘들어졌다.

정작 중요한 얘기가 나오는 모양이라 귀를 더욱 쫑긋 세우고 얘기를 들으려 했다. 하지만 벌써 엄마는 백 미터 밖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노인이…… 스물다섯 살쯤에…… 태몽 속의…… 성희에게 나타나…… 가야 한다고…… 그땐 꼭 가야…….”

신경을 곤두세울수록 성희는 몰려오는 잠을 이겨낼 수 없었다. 왜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순간에 잠이 쏟아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낱말들이 뚝뚝 끊겨서 들리는 듯하더니 이미 성희는 새근대는 소리를 두 귀로 들으며 의식이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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