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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Dec 14. 2024

누군가의 꿈

#8.

사람이 온전한 형태로 이 땅 위에 나타나기도 훨씬 이전, 한 자그마한 터에 그보다 더 작고 보잘것없는 연못이 하나 있었다. 들릴 듯 말 듯 졸졸졸, 미약한 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분명 처음엔 고작 몇 걸음 정도에 지나지 않던 것이었다. 세월이 쌓여가는 동안 길이나 폭, 그리고 깊이 따위가 조금씩 불어났다. 모든 신비스러운 일들이 그러기 마련인지 그런 변화는 누구도 인식하지 못했다. 어찌 되었거나…….

지금은 고요하기 그지없는 연못에 지나지 않는다. 위아래가 트여 한때라도 물의 흐름이 그치던 때가 없었다. 군데군데 깊이를 달리하고 물살의 세기 또한 그러했던 곳이었다. 으레 그런 곳이라면 이름이 있기 마련일 테다. 한참 뒤에 생겨난 인간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개울의 이름을 아는 이는 없었다. 처음부터 이름이 없었던 데다 그 같은 일을 시도해 본 사람조차 없었으니, 어찌 보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세상이 처음 열리던 그날부터, 그리고 어쩌면 사람이 생겨나기 훨씬 이전부터 그 개울이 있었다고 보는 게 옳겠다.

그러던 언젠가부터 그 개울에 두 마리의 뱀이 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물론 어디에서 흘러 들어왔는지 혹은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따위에 대해선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만 세월이 지나는 동안 대를 잇기 시작한 걸 보면 암수 한 쌍이었다는 것 정도만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수 천 수 만 년에 걸쳐 그들도 대를 이었을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 아홉 마리의 뱀들이 한 어미 밑에서 자라던 때가 도래했다. 한 배에서 태어난 새끼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늘 부딪치기 일쑤였다. 사실 늘 문제를 일으키는 쪽은 첫째였다. 그는 항상 나머지 형제들과 뜻이 달랐다.

어느 때부터인가 첫째를 제외한 나머지 여덟 형제들은 배를 깔고 늘 기어 다닐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에 이르렀다. 그에 반해 그들의 부모는 하늘의 부름이 있을 그날만을 기다리며 묵묵히 자신의 생을 이어가곤 했다.


무엇을 하거나 혹은 이루고 싶은 게 있을 때 그것을 분명 욕망이라고 일컬을 터였다. 흔히 사람에게만 욕망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짐승에게도 심지어는 하찮은 미물에게도 욕망은 있으리라. 다만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

적어도 아홉 마리의 뱀들은 이 땅을 굳건히 디디고 세상을 지배하게 해 줄 다리가 자라나길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마음껏 날아다니며 세상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게 해 줄 튼실한 날개라도 생기길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한 점의 소원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찰나에 그들에게도 다른 존재로 탈바꿈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건 분명 천기를 거스르는 일이긴 했다. 사실 천기라는 것은 누구도 건드려선 안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또 그렇게 세상에 드러나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오백 년이 흘러 뱀들은 모두 이무기가 되었고, 다시 오백 년이 흘러 그들은 용이 되는 순간을 맞이했다. 그제야 그들은 거추장스러운 허물을 벗고 그들에게 허락된 날개에 의지하여 승천하기만 하면 되는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비쳐 들었다. 빛이 시작하는 어딘가쯤을 향해 날갯짓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때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감지한 어미들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뒤를 따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저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그들은 감히 품어선 안 될 생각들을 품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들에게 마련된 하늘 한편, 그 공간에서의 영원한 삶 대신 세상을 지배하고 싶다는 욕심을 가졌던 것이었다. 욕심이라고는 없이 지극히 몸이 가벼운 상태라야 승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과연 그들은 몰랐던 것일까? 그 같은 욕심 때문에 아홉 마리의 용들이 하늘로 오르지 못한 건 당연한 이치였다. 땅 위에 남은 뒤에도 그들은 한참 동안 언젠가는 그 욕심이 실현될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그것은 곧 조물주 외엔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 같은 권능이 주어질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세상을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은 그렇게 함부로 가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 개울은 더는 개울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날개가 있어 날 수는 있다고 하지만 이미 천상으로 오를 기회를 잃어버린 그들이, 기약도 없는 긴 세월을 숨어 지내야 했기 때문이었고, 결국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흘러내리지 않는, 꽉 막힌 그저 그런 연못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아무리 천벌을 받아 마땅한 그들이라 해도 그들이 가졌던 영묘함이나 신통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연못에 그들이 깃든 뒤로는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수량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이 점만큼은 후세 사람들이 두고두고 신비한 일이라며 입을 모았고, 그것은 그대로 또 하나의 전설이 되기에 충분했다.




멍한 정신으로 성희는 집을 나섰다. 대문을 닫을 때에도, 골목길을 지나 큰길로 접어들었을 때에도 성희는 한 가지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지난밤에 엿들었던 아빠와 엄마의 대화 내용……. 하필이면 듣던 중에 잠들어 자연스럽게 연결되진 못했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성희가 가장 궁금해하는 노인의 정체에 대해서도 아빠와 엄마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빠와 엄마는 노인을 최소한 한 번은 만났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잠이 들면서 제대로 듣지 못했던 부분을 퍼즐 맞추듯 끼워놓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경찰서 네거리를 지나자 아파트 단지와 상가들이 보였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등교하는 아이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도 멀지 않아 성희는 늘 이렇게 걸어서 출근했다. 더군다나 외로움도 잘 타지 않다 보니 이 시간에 혼자서 다니는 데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작은 신호등을 건너자마자 시원스럽게 뻗은 길이 나왔다. 시멘트로 포장된 그다지 넓지 않은 길 양 옆에 가을이라는 계절에 맞게 들국화와 코스모스, 그리고 이름 모를 풀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수많은 꽃들을 배려한 건지 아니면 안전하게 아이들이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학교에서는 친절하게도 자동차들이 다닐 수 없도록 U 자형 쇠말뚝을 길 입구 한가운데에 거꾸로 박아 놓기까지 했다.

200m 정도 되는 탁 트인 길을 걷다 보면 향긋한 꽃내음을 맡을 수 있는 길이었다. 왼쪽으로는 생긴 지 몇 년 되지 않은 아파트 단지가 버티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비닐하우스와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누가 봐도 한쪽은 한창 개발이 이루어지는 중이었고, 맞은편은 개발의 열풍에서 밀려난 그런 곳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서로가 썩 잘 어울리지는 않는 것들이 한 곳에 어우러져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곧게 뻗은 이 길 중간쯤에 시멘트 포장이 안 된 작은 오솔길이 하나 난 곳이 있었다. 길이 작은 마을로 이어지 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마치 휴양림 속의 산책로를 생각나게 하는 이 오솔길은 사람의 발길이라곤 닿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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