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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Aug 09. 2023

덥지 않은 날

서른네 번째 글: 안 더워서 좋긴 한데.

5시 50분에 집을 나섰다. 어쩌면 비몽사몽에 가까운 정신으로 아무 생각 없이 아파트 출입문을 나서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전혀 덥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어쩐 일인가 싶었다. 일단 지금 이대로만 지속된다면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 지긋지긋한 땀과 이별해도 되지 않겠나 싶었다.

대개 요즘 나의 하루는 땀범벅으로 시작된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10분 동안 으레 땀으로 한 번 샤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시원하다. 바람도 꽤 불어 마치 벌써 가을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도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여름엔 더워야 정상이긴 하나 어딜 움직일 때마다 땀으로 도배하는 게 반가울 리 없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기분이 너무 쾌적하고 좋다. 적어도 하루 동안이라도 이 날씨가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어느 순간 무릎을 치고 만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다. 태풍이 북상 중이라 날씨가 이처럼 시원하게 느껴진다는 걸 왜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결과를 생각하자면 원인이 있기 마련인데, 너무 표면적인 데만 몰입했다.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관심을 쏟는 걸 보면 난 아직 한참 멀었다.




이번 태풍은 원래 내가 살고 있는 대구 지역을 정면으로 관통할 예정이었다고 했다. 태풍이든 장마든 늘 대구를 비껴가곤 했는지라 별다른 걱정도 없이 있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초긴장 상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며칠 간이었다. 일기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태풍의 규모가 부디 미미한 것이길 기원했었다.


그러던 태풍이 기압의 영향 탓인지 서쪽으로 쏠리는 바람에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서울을 관통하게 되었다고 했다. 솔직히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태풍의 영향권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하니 더없이 반가웠다. 전혀 영향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어쨌거나 우리나라에 직접 타격을 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은 착잡하다.


또 얼마나 많은 재산상의 피해를 입게 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혹은 행방불명이 될지 염려부터 앞선다. 자연재해라는 게 사람이 어떻게 한다고 해서 모든 피해로부터 완벽하게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는 없겠지만, 재난 후진국에 가까운 우리의 모습을 보면 가히 걱정이 될 뿐이다. 충분히 대비할 여유가 있을 때에는 아무런 논의도 없다가 꼭 어딘가가 부서지고 무너져야, 사람이라도 몇 명 죽거나 다치거나 혹은 행방불명이 되어야 그제야 움직이는 나라. 입을 여는 사람마다 호들갑을 떨고, 가는 곳마다 아우성만 들리는 우리나라가 아니던가? 태풍이 몇 년 만에 오는 것도 아니고, 해마다 최소 서너 개는 상륙하는데  왜 매번 이런 악순환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까?


북상 중인 태풍에는 아랑곳없이 안 더워서 마냥 좋다고 설레발친 아침이었다. 온 나라가 또 벌집이라도 쑤셔놓은 듯 엉망진창이 될 게 불 보듯 뻔한데도 속 편하게 더위 타령만 하고 있었다.

어차피 자연재해는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다. 다만 그 피해의 정도가 최소화되기만을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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