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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Dec 15. 2024

내면의 요청에 따르는 것

2024.12.15.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때 곁에는 자신의 몸, 정신, 두려움 그리고 삶의 여정에 들어서라는 내면의 요청뿐이다.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으로 우리 사회가 거대한 변화를 겪으면서 사람들 사이에 기대가 넘쳐났다. 덕분에 전보다 서로에게 더 가까이 접근하고 더 쉽게 서로를 찾아내게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만큼 서로를 끊임없이 귀찮게 하고, 불쑥불쑥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원치 않는 상업적, 종교적, 정서적, 감상적 말들과 사소한 내용을 쏟아부으며 서로를 이용하고 학대한다. (인간의 행적이 남는 곳마다 그림자도 발맞춰 따라온다.) 현대의 전자 세계가 선사하는 모든 연결성이 주는 혜택은 분명 인정할 만하지만,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분열되어 서로 단절되어 있다는 생각도 든다. ☞ 제임스 홀리스, 『오십, 어떻게 살아야 할까』, 도서출판 작은 우주, 248~249쪽


지금의 세상은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어느 누구도 혼자서 살아가려는 시도를 없고, 어쩌면 그렇게 혼자 살아갈 있게 내버려 두지도 않는 사회인지도 모릅니다. 그건 아무리 혼밥, 혼술 등의 혼자 누리는 문화적인 기회가 늘어가고 있다고 해도 어쩔 없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아이러니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제 주변에 있습니다. 지금은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곧 아내와 딸이 오면 표면적인 외로움은 덜 수 있을지 모르나, 근본적인 외로움을 털어낼 수 있게 해 주는 사람들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밖에서 그 많은 사람들 속에 끼어 있어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외로움을, 이젠 가정에서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그의 저서 『고독한 군중』에서, 대중 사회 속에서 타인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도 내면의 고립감으로 번민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성격을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가령 연극에서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할 때, 관중 속에 홀로 있는 느낌을 받는 것 등이 그 예입니다. 참으로 통렬한 지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혼자가 아닌데 결국엔 혼자라는 것입니다. 이건 거의 '1+1은 2가 아니지만 결국은 2가 수밖에 없다'라는 이상한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 어쩌면 해야 하는 것은 인용한 책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몸과 정신과 두려움 그리고 삶의 여정에 들어서라는 내면의 요청에 충실히 따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외로움을 감수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니까요. 왜냐하면 그 요청이 온 곳이 바로 우리 각자의 내면이기 때문입니다. 내면 속에서 지시하는 일들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세상의 그 어느 누구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성공적인 수행이 되든 실패하든 그 모든 과정은 처음부터 오롯이 혼자서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짐인 것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오십이라는 나이가 주는 무게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사실 지금과 같은 100세 시대라면 오십이란 나이는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닙니다. 100세의 딱 중간이니, 누구라도 중간 지점에 도달한 것을 두고 '많이 왔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다 왔다'라고 표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왔건 간에 이미 중간까지 흘러 왔으니 이제 남은 절반의 생(生)도 버티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겠습니다.


많이 살았는지, 아니면 말년에 이르러 의학적인 혜택을 입어 생각보다 더 많이 살게 될지, 지금의 저로선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이 '무게감'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는지는 반성해 볼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오십,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소셜 미디어가 길이 아닙니다. 인터넷도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예전보다 더 친밀하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주변인들도 그 키를 쥐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되돌아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인 채 고립된 섬 같다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제법 끈끈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도 결국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분열되어 있고 서로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몸과 정신과 두려움 그리고 제 삶의 여정에 들어서라는 내면의 요청에 따르는 것만이 해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바로 제 어깨에 실린 이 무게감을 감당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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