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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Aug 11. 2023

길을 가다가 소재가 떠오르면

아홉 번째 글: 언제 어디에서든 글을 쓸 준비가 되어 있나요?

저에게는 과거를 제대로 매듭짓지 못하고 헤어진 여인이 한 명 있습니다. 무려 20여 년이 넘게 지난 먼 과거의 인연이었던 한 여인이지요. 물론 저에게 아직도 그 여인에 대한 미련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당연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죽기 전까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안겨 준 그녀를 생각하면 가끔은 가슴 한편이 아린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어쩌면 짝사랑에 지나지 않았을 그 인연이 제게 이리도 깊은 각인이 된 건 아마도 그녀가 저에게 아무런 해명도 없이 저를 떠났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그녀가 저에게 연락을 해와 '그때 내가 왜 선배를 떠날 수밖에 없었느냐고 하면 말이에요.' 하며 말을 꺼내는 것도 이상한 상황이긴 합니다만, 가끔은 그렇게라도 그녀에게서 뭔가 얘기를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학부를 졸업하고 근 22~23년 동안,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늘 그녀는 제 가슴 한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를 떠난 이유에 대해 듣는다면, 마치 승천하지 못하고 한이 되어 구천을 떠돌던 귀신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듯 그렇게 마음을 접을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글을 쓰면서 글감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사실 표현력에 있어선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쉽지 그게 하루 이틀 연마한다고 해서 당장이라도 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 고민을 늘 안고 살아가던 어느 날의 퇴근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문제의 그 여인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아니지요.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난 게 아니라 그녀의 뒷모습을 제가 보고 만 것입니다. 신호가 바뀌고 그녀는 길을 건너갔습니다. 그녀가 제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엉뚱하게도 제게 새로운 글의 소재가 떠오르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이미 그녀는 사라지고 없습니다만, 잠시 제 시야에 붙들어 둔 채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사거리에 서서 휴대폰으로 한 편의 글을 뚝딱, 하고 완성했습니다.


참고로 아래의 글은 제가 그때 완성한 글입니다. 글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아닌지를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제 소관이 아닐 뿐만 아니라, 제가 지금 정작 얘기하고 싶은 것은 길을 가다가 글의 소재를 만났을 때는 이런 식으로라도 글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길을 걷다가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너를 보았어. 그래, 맞아. 이건 우연이라는 말 외엔 설명이 안돼. 그렇게 너를 보게 되다니……. 나 역시 퇴근하던 길이었으니 평소처럼 곧장 집으로 갔다면 널 보지 못했을 거야. 왜, 그냥 그런 날 있잖아. 특별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찍 들어가 봤자 유익할 것도 없었을 것 같은 그런 날 말이야.

조금 더 걷고 싶었어. 별다른 목적도 없이 그냥 조금만 더 걷다 들어갈 생각이었어. 그러다 너를 보고 말았으니 사실 그건 내게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어. 무슨 삼류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처럼 10년에 한 번씩 널 만나게 되는 건 어쩌면 우연을 가장한 기적인지도 모르겠어.

하루도 빠짐없이 너를 생각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항상 내 마음속 한 언저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게 바로 너였어.


그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던 너는, 사십 대 후반에 가까운 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눈부시게 빛이 났어. 마치 세월이 너를 고스란히 비껴간 것 같았다고 하면 너무도 식상해 빠진 표현이겠지. 그래도 이 말밖엔 생각나는 게 없어.

서로 학번은 달랐지만 시기가 겹친 몇 해를 제외하고 네가 졸업한 뒤로는 공식적으로 못 봤으니 자그마치 22년 만이던가? 이십 대 초반의 파릇파릇한 그 생기 어린 얼굴이 여전한 널 본 순간 난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어.


아, 그러고 보니 대략 십 년 전쯤에 길에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긴 있었구나! 그땐 그래도 정면에서 마주친 까닭에 몇 마디 인사라도 나누었는데,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어. 한 삼십 미터쯤 떨어진 거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금세 신호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너한테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라고. 물론 날 미처 못 본 네가 다가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지.

횡단보도를 거의 다 건넜을 즈음, 마음 같아선 몇 초 남지 않은 파란불이 빨간색으로 바뀌기 전에 달려가 네 손을 잡아채고 싶었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내게 돌리면 이번엔 정말 너에게 묻고 싶었어. 그때 왜 그렇게 내게 말도 없이 떠나갔냐고…….


아마도 나는 금방 달려온 탓에 숨을 헐떡이며 말을 하게 될 거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적어도 내가 헛소리는 하지 않는구나 하며 넌 생각하겠지.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런 뜻밖의 질문에도 너는 태연하게 말할 거라고 생각해. 선배,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라고……. 원래 너는 포커페이스의 달인이었으니까. 좋으면 좋은 표정을 감출 수 없고, 어떤 장소에서든 싫은 티는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고 마는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넌 꽤 능숙했거든. 처음 만나던 순간에도 그랬고 내가 너를 알고 지낸 5년이라는 시간 동안에도 늘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미 이만큼이나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런 너를 비난하려거나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너를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야.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어. 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 한 여인을 만나서 결혼도 했고 이젠 어엿이 아이들도 있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반문해도 내 대답은 한결같을 거야. 못 들었다면 한 번 더 말해 줄게. 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었어. 내가 왜 ‘사랑했던’이란 과거형을 쓰는지는 너도 잘 알 거라고 생각해. 이미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이십 수년 전에 멈춰 버렸거든. 욕심 같아선 우리의 사랑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만, 그건 어쩌면 네가 내게 조금의 마음도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야.

어쩌면 그날처럼 넌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어. 네가 근무하는 직장이 인근에 있는 것도 알고, 걸으면 불과 얼마 안 되는 곳에 살고 있다는 소문도 들어 알고 있지만, 도저히 따라가 볼 엄두는 나지 않았어. 정확히 어디 사는지 몰라서 따라나서지 못했다는 건 아마 유치한 변명인지도 몰라. 오래전 그때처럼 막상 달려갔을 때 네가 내게 보일 표정에 자신이 없었고, 그날처럼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그 어디에도 네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겁이 났기 때문이야.

네 발길이 향하던 쪽으로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내가 그렇게 무기력할 수 없었어. 물론 뒤따라간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말이야.


미안하지만 두 가지만 양해를 해줬으면 해. 기어이 너를 따라잡아 내가 너를 길 한가운데에 세워두었다고 생각해 줘. 그리고 마냥 그대로 서 있을 순 없으니 근처 작은 카페에라도 들어가 잠시 얘기를 하기로 했다고 가정해 줘.

지금부터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캐러멜 마끼아또와 네가 좋아할 돌체 라테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될 것 같아. 너에게 그 어떤 선택권도 없는 건 아니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말고 내 말을 그냥 묵묵히 들어줬으면 좋겠어.

어차피 내 말이 너에게 전달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언젠가 한 번은 막상 이렇게 마주 대하게 되더라도 끝내는 내가 하지 못할 말을 굳이 이제 와 하려는 건 그때 제대로 치러내지 못한 이별의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어.

솔직히 나도 이렇게 내가 용기가 없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어. 변변찮은 외양에 내세울 것 하나 없던 그때의 나조차도 어디 하나 꿀릴 것 없이 당차게 행동했었고, 그 쟁쟁한 경쟁률을 뚫고 너에게 고백까지 했던 나였는데, 그 패기는 아니 객기는 어디로 가 버린 건지 모르겠어.




P.S.) 혹시 뒷얘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제 브런치북 "단편소설집 II"를 보시면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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