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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Aug 10. 2023

글쓰기는 게임이다.

공항에 묶여서 쓰는 글

글쓰기는 좋은 놀이이다. 각 잡고(?) 해야 하는 놀이들과 달리 시공간의 제약이 거의 없는 놀이이다. 돈도 거의 들지 않으니 이만큼 착한 놀이가 어디 있는가.


공항에 발이 묶였다. 6호 태풍 카눈이 북상해 오면서 미리 예매해 두었던 항공편은 결항되었고 오랜만의 육지행에 신나 있던 우리 부부의 들뜬 마음은 갈 곳을 잃고 붕 떠있기만 했다. 평소 텔레비전을 잘 안 보는 우리인데 결항이 가져온 헛헛한 마음 탓인지 텔레비전 앞에 앉아 한참을 보냈다. 이대로 육지에 가지 못한다면 빨라야 추석은 되어야 잠깐 육지를 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멍하니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한참을 보낸 후에, 우리의 불안증세는 점점 커져갔다. 창밖으로 비가 오는지 바람은 부는지 보기도 하고, 뉴스를 종일 틀어두고 태풍이 어디쯤 지나고 있는지, 봤던 뉴스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고 있었다. 그러고도 항공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결항정보를 확인하기를 몇 시간째, 태풍이 육지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제주 하늘엔 새파랗게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 오, 어쩌면..!


거실에는 우리의 상태를 보여주는 싸다 만 짐가방이 놓여 있었다. "여보, 짐 챙기자." 아침 비행기를 탔어도 이것보다 급하진 않았을 것이다. 부랴부랴 씻고 짐을 챙겨 공항으로 왔다. 가서 남는 표라도 어서 건질 요량으로 공항에 도착했는데 우리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 이미 공항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인파를 헤집고 줄을 서서 항공편 스케줄을 변경했다. 본래 예정보다 10시간 남짓 늦은 비행기였지만 육지에 갈 수 있어서 기뻤다.


더 빠른 비행기를 찾아보려다가 전광판 상태가 모두 결항인 것을 보고 이내 포기했다. 아마 지금 예매한 시간이 가장 빠른 것 같다. 남은 시간은 6시간 남짓, 30분 거리의 집으로 다시 가자니 귀찮기도 했고, 주차타워에서 차를 뺐다가 다시 댈 곳을 못 찾을까 염려되기도 해서 공항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곧 운항이 재개되면 사람이 더 몰릴터라 주차난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새벽에나 겨우 주차할 수 있는 타워에 주차했으니 포기할 수 없었다.


공항을 한 바퀴 둘러본다. 어제오늘 결항 여파로 발이 묶인 승객들이 많다. 표를 못 구해서 예민한 사람들,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 승객이 직원에게 상황을 묻는 장면, 우리처럼 늦은 표를 구해놓고 한쪽 구석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 태풍으로 평소보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피곤해 보이는 항공사 직원들. 어쩐지 느긋한 마음이 된 우리 부부는 공항을 구경하듯 돌아 커피나 한잔 할 생각으로 카페에 와 앉았다.


언제 태풍이 지나갔냐는 듯 맑은 하늘에 하나 둘 출발하는 비행기를 보며 우리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고, 남은 몇 시간을 잘 보내기만 하면 되니 마음도 룰루랄라 즐겁다. 글쓰기 최적의 장소는 아니지만 스마트폰을 열어 오늘을 기록해 본다. 태풍 때문에 여름휴가 항공편이 결항되고, 기다리다 무작정 공항에 와서 표를 바꾸고 시간이 남아 커피 한잔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새롭다. 나의 역사책에 기록할만한 순간인 것 같다.


내게 글쓰기는 또 하나의 게임이다. 나는 핸드폰으로 SNS도 하지 않고, 영상을 보는 앱조차 없고, 게임도 전혀 하지 않는다. 자주 쓰는 노란색 스냅챗도 알림이 모두 꺼져 있다. 있으면 자주 들락날락 거리는 내 습성을 알고 모두 차단해 버렸다. 그래서 핸드폰을 사용할 만한 시간이 있으면 뭔가 읽거나 쓰는 경우가 많다.


영상도 재미있고 게임도 좋지만 내게는 글 쓰고 읽는 것만큼 재미난 게 없다. 어제 하루 글을 쓰지 못했는데 (정확하게는 발행하지 못했는데) 온통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뿐이기 때문이다. 게임에 빠져본 사람은 알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이 게임 내의 캐릭터로 보이고, 하루 종일 게임과 관련된 생각을 하지 않는가. 뭘 보더라도 좀 다르게 보려고 하고, 글로 어떻게 표현해 보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게임 중독 수준까지는 못 되어도 꽤 글에 빠져 있는 것은 확실하다.


또 나는 완벽주의 기질이 강해서 '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시도를 잘 않는데, 공항 카페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뭘 쓰고 있으니 글쓰기를 즐길 수 있는 게임처럼 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글을 쓰면서 뇌 구조도 바뀐 것 같다. 뭐든 '잘' 하라고 자꾸 부추기는 녀석이 사실은 검열관이었고, 못하게 방해하는 놈이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또 열린 눈으로 살다 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보이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돈 되는 짓(?)만 열심히 했는데, 돈은 안되지만 즐거운 일을 하면서 나와 더 친해지기도 했다.


게임은 즉각적인 보상을 준다. 아이템을 사거나 캐릭터가 강해지면 즐겁다. 하지만 즐거움의 지속시간이 짧고 시간의 밀도도 낮다. 깊은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오랫동안 게임을 하고 나서 상쾌했던 경험은 별로 없다.


글쓰기의 재미는 맛보기까지 오래 걸린다. 작은 도미노가 점차 큰 것을 넘어뜨리듯, 글쓰기로 첫 도미노를 넘어뜨리는 재미를 맛보면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글을 쓰는 게 게임하는 것보다 재미있다면 믿을 수 있는가. 나는 모쪼록 모든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구름이 좀 빨라지긴 했지만 바깥의 잠자리들도 여유롭게 떠있는 걸 보니 우리의 비행에도 차질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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