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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Aug 12. 2023

지하철에서 글을 써 보세요!

열 번째 글:  모처럼만에 지하철 순례를 합니다.

모처럼만에 지하철 순례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조금 전 월촌역에서 마지막 역인 안심역까지 오는 44분 동안 '어떤 꼴불견'을 썼습니다. 이제는 되돌아가면서 또 한 편의 글을 쓸 차례입니다. 때마침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안심역에서 설화명곡역까지 총 31개의 역을, 55분 동안 달리게 됩니다. 막 안내방송이 나오고 열차가 출발했습니다.

지하철에서 쓰는 글이라면 뻔합니다. 가장 만만한 주제가 바로 눈에 보이는 대로 쓰기입니다. 기관실이 붙은 1호차에 탑승해서인지 같은 칸엔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마침 두 번째 역에 정차합니다. 두 사람이 지하철에 오릅니다. 일면식도 없는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들은 당분간 저의 관찰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제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대략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람입니다. 키도 굉장히 크고 생김새도 보통 이상인 걸로 봐선 아마도 대학생이라면 같은 과에서 제법 인기도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전반적으로 살이 찐 스타일은 아닙니다. 전완근까지 쫙쫙 갈라지는 걸 보면 평소에 운동 꽤나 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주머니가 달린 카고팬츠를 입은 그는 어쩌면 자기 몸보다 더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 두고 폰을 보고 있습니다. 폰을 쥔 왼손 손가락에 묵주 금반지가 보입니다. 물어보나 마나 성당을 다니고 있는 사람일 겁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제 맞은편 오른쪽에 있던 여자 한 분도 카고 팬츠를 입고 있습니다. 숄더백을 맨 그녀 역시 표정의 변화 없이 폰만 보고 있습니다. 나이는 역시 20대 초반인 듯 보입니다. 똑같이 카고 팬츠를 입고 남자와 같은 역에서 타긴 했어도 일단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두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그렇게 매칭하기엔 남자 쪽이 많이 기우는 느낌이 듭니다. 뭐랄까, 여자는 그냥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스타일입니다.


두 사람을 지켜보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벌써 9번째 역에 정차합니다. 많은 사람이 탔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한 여성이 눈에 들어옵니다. 나이는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데, 그녀의 미모 때문에 제가 그녀를 본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그녀의 온전한 얼굴은 짐작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제 눈길을 사로잡은 건 오른손에 그녀가 꼭 쥐고 있는 꽃다발 때문입니다. 약간 어깨를 드러낸 정장풍의 옷을 입은 데다 시간으로 봐선 아무래도 근처 어딘가에서 있었던 결혼식에라도 다녀온 모양입니다. 아무리 봐도 그녀가 들고 있는 꽃은 부케로 보입니다. 꼭 그런 건 아니라고 해도 부케는 다음에 결혼할 사람을 콕 집어서 던져준다고 하니 저 여성도 조만간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부케를 든 저 여인도 폰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같은 칸에 탄 25명 중에 13명이 열심히 폰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속에는 저도 포함됩니다. 나머지 12명은 뒤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책을 펴 들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중앙로역에 도착하니 갑자기 지하철 탑승객의 평균 연령이 확 내려갑니다. 이젠 거의 선 사람이 앉은 사람의 수를 넘어설 정도로 열차 안이 복잡해집니다. 종점에서 탄 덕분에 아무리 복잡해도 걱정은 없습니다.

쓸 때마다 느끼는 것입니다만, 특별할 건 없어도 이렇게 지하철 순례를 해보는 것도 꽤 해볼 만한 일입니다. 뭐, 그냥 우리 눈에 흔하게 보이는 모습을 적은 것이라 재미는 덜 해도 이 역시 조금 더 나은 표현력을 기르는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 19번째 역에 정차합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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