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아버지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겠지만, 난 아버지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차마 밝히긴 뭣하지만 내 성장기에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내가 아버지를 무서워했던 것 같다. 정말 무서웠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건 확실했다.
어떻게든 나는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군대에 말뚝을 박을까, 하는 고민도 진지하게 해 봤고, 그전엔 대학 진학도 아주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계획까지 품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하필이면 집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교대에 진학하게 되었을 때에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엑소더스. 유일한 내 삶의 목표가 내 손에 의해 좌절되었으니까 말이다.
살아오면서 왜 그렇게 아버지를 싫어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싫었다. 얼굴을 마주치는 것도 안 반가웠고, 간간이 지나치며 내 근황을 묻는 것도 싫었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한번 꺼낸 말은 그 어떤 경우에도 되돌리는 법이 없고, 아버지라는 권위 하나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아버지였다.
오죽했으면 밥은, 아는, 자자,라는 세 마디 말밖에 할 줄 모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뚝뚝한 경상도 상남자였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늘 이해할 수 없다고, 난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론 내 아버지의 판박이가 되고 만 나 자신을 보며 요즘 종종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
사실 병원에 가던 날도 기꺼이 내 마음이 움직여 모시고 간 건 아니었다. 지금도 말로 설명하긴 어려운데, 어쩐 일인지 그날은 꼭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간 그날, 병원복으로 환복 하는 동안 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한 늙수그레한 늙은이를 보게 되었다. 사십여 년이 넘는 그 오랜 독재 기간에서 보였던 당당함이나 날카로움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의사와 검진 결과를 두고 얘길 나눴다. 위암 말기. 개복도 의미 없다고, 길면 세 달, 짧으면 3주 정도로 예상된다고 했다. 퇴원 후 집에서 편안하게 보내다 가시게 하거나,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기에 병원에 남기로 했다.
면담을 끝내고 병실로 돌아와 보니, 그 근엄하고 무서웠던 아버지는 온데간데없고 마치 온몸에 기구를 꽂은 채 엄마만 기다리는 한 아이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어쨌거나 아버지는공교롭게도 바로 다음 날 돌아가셨다.
겨우 그렇게밖에 살 수 없으셨냐,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시느냐 따위의 의문은, 내가 이제 두 자식의 아비가 되고 보니 이해되는 측면이 적지 않았다. 살아오는 내내 엄마와 나를 많이 외롭게 하며 사셨지만, 그러는 당신도 참 많이 외로우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제야 비로소 드는 것이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큰소리치던 무모한 젊은이, 그 젊은이가 어느덧 중년을 지나 초로에 접어들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냐는 말이 있듯, 그 어떤 것도 내겐 녹록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아버지 역시,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다 느끼셨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면, 정말이지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는 생각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