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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Aug 15. 2023

부끄럼 회복

0429

뻔뻔해지는 것은 질병이지만 부끄러울 줄 아는 것은 능력이다.

부끄러움은 간지럼처럼 살아갈수록 퇴화된다.

무성해지는 수염 같은 나이 속에 감추고 애써 잊어버린다.

성우 연기를 지도하다가 청소년 목소리를 어려워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곤 한다..

놀이기구 타듯이 한없이 부끄럼을 타던
그때의 너를 떠올려 보렴!


성우연기는 알량한 테크닉의 목소리가 아닌 정서 자체를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겨우 청자에게 가닿는 몸소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부끄럼의 쓸모는 맹장처럼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맹장은 인간의 몸에서 사라져도 목숨에 지장 없지만 맹장이 없으면 지구 밖으로의 우주여행을 할 수 없다.

부끄럼이 내 감정의 팔레트에서 사라진다 해도 일상이 불편해지지는 않으나 윤동주의 서시를 온전하게 낭송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는 감정으로 잎새에 이는 가녀린 바람에 괴로워하기는 불가능하다.

우주에 갈 일 없다고 시 따위가 밥 먹여 주냐고 반문한다면 할 반박은 운동장 가득이지만...

부끄럼의 결여가 쓸모와 연결되지 않으니 내 몸에서 불필요한 지방을 빼내듯 제거하고 있다.

세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지만 부끄러움마저 잊고 사는 것은 감성의 스펙트럼을 협소하게 한다.

단 음식에도 소금이 들어가듯이 진정한 달변에는 부끄러움이 적절하게 녹아 있다.

이는 겸손과 겸허의 보존원료 같은 것이다.

부끄럼은 내성적인 자들의 에너지 주머니!

그래서 부끄럼 많은 이들의 갑작스런 표출에 똘끼가 흘러 넘치기도 하다.

다소 부끄럼이 용수철이 되어 응집된 재능을 발산한 탓이다.

혹시 주변에 부끄럽다고 몸을 또아리틀듯 베베 꼬고 있는 자가 있다면 조만간 어떤 이벤트를 풀어 펼칠지 모른다.


부끄럼이 사라진 이의 표정은 너무 무섭고 사납다.

부끄럼이 애초부터 인간적인 모습의 원형이어서일까.

나는 타인을 대면할 때보다 글을 쓸 때 부끄럼이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는데 소년으로의 회귀를 체험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억지로 어른스러워지지 않으련다.

부끄럼이 어른에게 있어서 부적절한 감정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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