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닥치고써 Aug 22. 2023

부산 가는 길

마흔일곱 번째 글: 꼭 멋진 곳을 들러야 여행인가?

모레 개학을 앞두고 하루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아내에게서 허락을 얻어냈다. 어디 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데다 아마도 기억이 맞다면 마지막 여행을 한 게 족히 3년은 넘었으니, 고작 하루 가는 이 여행길도 마치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다.

어제오후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저녁에 아내가 어디로 갈 거냐며 물었다. 원래는 내일 가려고 했었다. 만날 집구석에만 틀어박혀 있던 촌놈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딱히 관심도 없다.


그냥 혼자 이렇게 기차를 타고 있는 자체가 좋고, 누구 눈치 볼 필요 없이 모든 걸 내가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게 좋을 뿐이다. 잠에 들기 전 부산 지하철 노선도를 들여다보다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네 곳이나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이 죄다 2호선 상에 있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끝자락엔 해운대가 있다. 그래서 바로 결정해 버렸다. 알라딘 중고서점 네 곳을 순례한 뒤에 해운대로 가서 바다를 보기로 결심했다.

아내에게 여정을 얘기했더니 깨알 같은 잔소리를 해댔다. 사람이 어찌 그 모양이냐고 한다. 뷰 좋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어딘가에서 보고 들어 알게 된 맛집 투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부산까지 가서 고작 들른다는 데가 또 서점이냐며 타박했다.

남이야 서점을 가든 어딜 가든 여행 가는 사람 마음 아니냐며 대거리를 하려다 가까스로 참았다.


아내의 말처럼 내가 이상한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왜 꼭 뷰 좋은 데를 가야 하고, 사람들이 마냥 줄 서서 기다리는 곳엔 무조건 다리 한 짝이라도 걸쳐야 여행이 되는 것인가? 흔히 말하는 관광명소엔 눈도장이라도 찍어야 하고, 반드시 점심이나 저녁은 맛집으로 유명한 곳에서 먹어야만 여행이 되는 것인가? 사람의 생김새가 모두 다르듯 여행의 스타일이 다른 게 당연한 일 아닌가?


결과야 어떻든 지금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중이다. 막 경산역을 지났으니 아직 1시간 20분은 더 가야 한다.

난 늘 느림의 미학에 대해 동경을 갖고 있다. 원래 성격 자체가 굼뜬 탓도 있지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속전속결로 이루어지는 걸 몹시 싫어한다. 그러나, 아내는 그 느림의 미학이라는 것이 게으른 사람들이 자기합리화하려고 만들어낸 것이라 한다.

누구의 말이 맞든 난 이렇게 (KTX를 탈 때보다 1시간은 더 걸리는) 가장 느린 기차를 타고 여유를 즐기는 것이 좋다. 생각나면 한 줄의 글이라도 더 쓰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길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족하지 않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줌에서 만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