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닥치고써 Sep 03. 2023

교사의 죽음

쉰아홉 번째 글: 나머지 58명의 죽음은 어떻게 되는가?


약 7주 전,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유명을 달리했다. 다들 알다시피 자연사도 아니고 그건 자살이었다. 물론 그녀가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의미로서의 자살은 아니다. 그 어떤 선택지도 없이 아마도 그녀는 그렇게 떠났을 것이다. 게다가 죽음을 선택한 장소는 학교.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숱하게 저질러졌을 은폐, 그녀의 죽음 역시 누군가는 분명 묻히길 바랐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삽시간에 그녀의 죽음이 알려지고, 마치 도화선에 불이라도 붙인 마냥 전국의 선생님들이 들고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많은 선생님들이 목숨을 포기했지만, 어쩐 일로 이 선생님의 죽음은 세간의 관심을 비껴가지 못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최근 6년 동안 선생님들 중 100여 분이 자살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초등학교 선생님은 총 57명,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수일 텐데, 며칠 전엔가 또 두 분의 선생님이 자살을 선택했으니 그 수는 59명이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른다. 작년 한 해 교통사고 사망주 수가 2천여 명이 훌쩍 넘는데, 고작 6년에 60여 명 죽은 걸로 난리냐고 말이다. 만약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하다 이런 수치에 이르렀다면 모르겠지만, 구조적으로 교사의 죽음을 촉발한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문제 삼으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어보나 마나 대부분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개인사와 관련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학교와의 일로 인한 갈등 때문에 자살했다고 하면 당장 학교 안팎이 시끄러워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 그렇게 되는 걸 두 눈 뜨고 지켜볼 교장이나 혹은 교감은 없다. 소위 관리자라고 일컬어지는 그들이 교사의 죽음에 대해서 조금도 가슴 아파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의 그런 죽음이 관리자들의 발목을 붙들고도 남을 만한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교감의 가장 큰 업무가 전체 교사 통괄이고, 교장의 임무가 학교 통괄인 것을 감안한다면 교사의 죽음은 그냥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이번 경우처럼 학교 안에서 자살하게 된 경우엔 사안의 심각성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이들을 가르쳐왔던 어떤 선생님이 자살을 한다. 솔직히 사안이고 뭐고를 조사할 필요도 없이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이라면 그 선생님이 왜 자살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를 리가 없다. 학교는 본의 아니게 은폐 작업에 돌입한다. 맞다, 처음부터 동료교사의 죽음을 덮으려는 정신 나간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그건 정말이지 사람의 탈을 쓴 악마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 말이다.

이건 어쩌면 학교의 입장만을 탓할 수도 없을 테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살한 선생님의 죽음에 그 어떤 책임도 없다고 믿는 누군가는 크게 다치게 된다. 그걸 과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 학교에서 어떤 선생님이 자살하셨는데 아무래도 학교폭력 관련이나 학부모의 악성 민원 같아요, 하며 자진 신고하게 되면, 학교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다.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진상 조사 후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 각자의 책임이 할당되고 나면 사태는 일단락되는 셈이겠지만, 상식적으로 누가 이것을 감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경우에 따라서는 옷을 벗게 될지도 모를 결과를 기다리기보다는 가능하다면 사건을 은폐하고 싶지 않겠는가? 자살한 선생님의 유족 측이나 일반인들이 봤을 때에는 진실을 은폐해 가면서까지 그럴 수 있느냐고, 그러고도 당신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구조를 딱 그렇게 만들어놨다. 어찌 되었건 간에 일단은 발부터 빼고 보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건 한 사람의 죽음을 낱낱이 까발리기보다는 은폐라는 무책임한 행동을 일삼는 학교나 관리자의 입장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구조적인 측면에서 오는 것이지 그들 개별적인 인성이나 가치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느 정도 은폐 작업이 시도됨과 동시에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들에게는 철저한 함구령을 내린다. 물론 그런다고 그 일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나가지 않을 리 없다. 알다시피 경찰은 사건성이 없는 사안에 관해선 굳이 개입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교육청에 어떻게 보고하느냐에 따라 그 선생님의 죽음은 더 크게 이슈화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말 그대로 개인사에 따른 선택으로 치부되고 만다.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매정한 것 같아도 이것이 공동체를 지키는 길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죽어 간 누군가는 결국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가 된다.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희생한 선생님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힐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런 죽음을 보면서 나는 안 그래야지, 하는 다짐 정도는 하지 않겠나 싶지만,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오래 기억될 리도 없다.


그러나 이번 서이초 그 선생님의 죽음은 차원이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그녀의 죽음은 우리에게 큰 상처를 안겨 주었고, 그 상처를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줬으며, 어쩌면 함께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것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6년 동안 돌아가셨다는 나머지 59명의 선생님들의 유족은 지금쯤 어떤 마음이 들까, 하고 말이다. 그들의 죽음은 그냥 묻혀 버렸다. 그들과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의 기억 속에 어쩌면 개인적인 일 때문에 힘들어 자살한 것으로 마무리되었을 수도 있고, 조금만 참으면 되지 그거 하나 못 참아 죽었느냐 하는 소리까지 들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흔한 사람들의 입소문조차 타지 못한 채로 말이다.


어떤 직종에서든 죽음이라는 게 없을 수는 없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업무와 관련한 죽음 역시 생길 수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더 이상의 억울한 죽음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여기에 옮겨 볼까 한다.


역시 이 나라는 누군가가 죽어 나가야
그제야 움직이는 시늉이라도 하는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코발트블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