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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Sep 25. 2023

가방끈 길다고 공부 잘하는 건 아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어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은 아마도 이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방끈 길다고 공부 잘하는 건 아이다."

몇 번이고 곱씹어 봐도 진리 중의 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제 가방끈이 길다는 건 아닙니다. 나름 석사 학위는 소유하고 있지만, 요즘 같이 박사 학위 소지자가 수두룩한 시대에 제가 가방 끈을 운운할 주제는 못 됩니다.


난데없는 웬 가방끈 얘기냐고 하겠지만, 전 여기에서 조금은 다른 차원의 가방끈을 얘기해 볼까 합니다.

우린 글쓰기를 하기 전에 소재는 뭘로 하고, 주제는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 고심합니다. 누구는 평면적 인물로 하고 누구는 입체적 인물로 삼을지 따위의 세부적인 인물 설정은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고, 작품을 효과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1인칭이 좋은지 3인칭이 더 나은지 등의 시점을 선택합니다. 맞습니다. 글을 쓰려면, 특히 스토리 위주의 글을 쓰려면 반드시 갖춰야 하는 요소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가방끈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다 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자유자재로 인물을 배치하고 시점을 정할 수 있는 데다 주제를 드러내는 데 탁월함을 발휘한다면 아마도 이것 이상 좋은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좋은 작품이 나올 거라는 데에는 저 역시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글의 소재를 찾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주제는 차치하고라도 그 흔한 몇몇 장면에 대해서 떠오르는 게 없다면 과연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제 아무리 유명한 강사의 글쓰기 강좌를 쫓아다니고, 세계적인 글쓰기 베스트셀러를 읽어도 우리에겐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적어도 강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 그리고 책을 덮는 순간 백지장처럼 새하얘져버린 자신의 머리를, 그냥 그 자리에 멈춘 채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튼실하게 제 기능을 하는 가방끈이 아닙니다. 너무 짧아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끈이 달려 있더라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가방입니다. 물론 온전한 형태를 지닌 가방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금방이라도 한쪽 손잡이가 떨어져 나갈 듯한 쇼핑백이라도 내용물만 들어 있다면 좋습니다. 심지어 엉성하게 묶인 비닐봉지에 담긴 것이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무수히 많은 글쓰기 책을 제가 주변에 권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글쓰기에 대한 기초가 전혀 없거나 도무지 한 줄의 글이라도 쓸 수 없는 사람에겐 어느 정도의 글쓰기책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런 사람들에겐 글쓰기 방법을 가르치는 책보다는 글 쓰는 동기를 고취하는 책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글쓰기책을 쓰레기라고 치부할 수는 없으나, 제대로 글을 쓰려면 글쓰기책부터 치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듯이 다이어트책을 읽는다고 살이 빠질 리는 없으니까요.

더는 가방끈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튼튼하고 때깔 나는 가방끈이 있다고 해도 정작 이를 연결할 가방이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가방끈 길다고 공부 잘하는 것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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