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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03. 2023

철없는 남자

004: 프리츠 오르트만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읽고…….

한 마디로 이 책은 두께가 주는 느낌과 비교해서 너무도 큰 놀라움을 제게 주었습니다. 읽는 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었고, 과연 그 '곰스크'라는 이상향이 제 마음속 어딘가에도 있었을까, 혹은 지금도 있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지극히 단순한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습니다. 복잡할 정도로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엎치락뒤치락하며 심각한 스토리 라인을 내세우는 그런 이야기도 아닙니다. 누구나가 읽기만 하면 쉽게 이해되는 그런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기는 순간순간마다 잠시라도 멈추고 깊은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선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늘 이상 속에 들떠 있는 '나', 그런 나와 그다지 불화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듯하면서 은연중에 나의 모든 행동에 제동을 거는-게다가 내 노력을 가장 심하게, 그리고 가장 불쾌하게 방해하며 막는(본 책, 9쪽)- 아내, 그리고 나의 그 갈망을 실현하는 데 있어 크고 작은 갈등 요소를 제공해 주어 아내에게 힘을 실어 주는 역전호텔 주인 여자,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서 내렸다 기차를 놓친 뒤 어쩔 수 없이 머물게 된 한 마을의 이장과 그리고 그 마을에서 오랜동안 교사 역할을 하다 노쇠하여 나에게 그 자리를 대신 물려주게 된 선생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아마도 지극히 부모에게 효자 노릇을 했을 이야기 속의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곰스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곰스크, 그 멀고도 멋진 도시……. 언젠가 곰스크로 떠나리라는 것은, 내 성장기에 더 말할 것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곰스크는 내 유일한 목표이자 운명이었다. ☞ 본 책, 10쪽     


그래서 나이가 들어 떠나게 된 바로 그 곰스크,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지만 아내는 뭔가가 마뜩지 않습니다. 너무도 설렌 마음으로 기차에서 제공하는 음식들을 먹으며 꿈에 부풀어 있는 '나'와는 달리 아내는 어딘지 처음부터 모든 게 불만인 듯 보입니다. 기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입에 음식이라고는 넣지 않았을 정도로 불만투성이였던 아내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두어 시간 차가 정차했을 때 내리게 된 어느 마을, 상쾌한 공기를 흡입해서 기분이 한껏 나아진 것이리라 믿었지만 아내는 더 이상 곰스크로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내(주인공)가 기차를 놓치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아내를 채근하든 말든 그녀는 바로 그곳에서 그냥 체류하길 바랍니다.     


남자는 나이가 지긋해져도 좀처럼 철이 들기 어렵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으면서 그냥 현실에만 급급해 살아가는 모습도 어딘가 모르게 답답한 감이 없지 않겠지만, 적어도 한 가족을 꾸려나가는 가장의 입장에선 너무 이상에만 젖어 있는 것도 지극히 바보스럽고 한심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에 처해 있음을 깨닫게 해 주어 어서 여기서 나가자는 한 친구의 말에, 안 된다며, 우린 고도를 기다려야 할 임무(?)가 있다며 내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이야기 속의 나는 끊임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내게 있어서의 '고도'인 바로 그 '곰스크'로 가야 한다는 사명감만 가슴속에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이상은 아마도 어쩌면 그걸 꿈꾸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자가 말하더니 도대체 어디로 가던 중이었냐고 갑자기 물었다.
"곰스크로요." 내가 대답했다.
"아, 곰스크……."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못 믿겠다는 투로 눈을 치켜뜨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곰스크에선 뭘 하려고?"
"그냥 일단 곰스크로 가는 게 목표입니다." 나는 애써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 본 책, 17쪽     


호텔 주인 여자와의 대화 내용이 어딘가 심상치 않습니다. 꿈은, 적어도 내가 꾸고 있는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고 일깨워 주려는 듯했습니다. 어떻게든 좀 더 현실 생활에 눈을 뜨고 잘 적응해 가느냐는 바람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여인네들에게 그저 짐이 될 뿐인 어리석은(?) 남성들의 모습이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이건 좀 지극히 개인적이긴 하지만 이런 대화 상황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책상에 머리를 박고 열심히 글을 쓰는 내게 아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느냐고 갑자기 물었다.
"뭐 하긴? 글 쓰고 있지!" 내가 대답했다.
"아, 글……."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못 믿겠다는 투로 눈을 치켜뜨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글 써서 뭘 하려고?"
"그냥 작가가 되는 게 목표야." 나는 애써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현실이 못 견뎌서 무조건 탈출하려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건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품어 온 꿈인 곰스크로의 여행을 포기할 수 없는 '저'는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아내의 모습을 보며 갈등을 일으키곤 합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입니다. 글을 쓰고 있는 저는 조금만 더 하면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착각 속에 사로잡힐 수 있지만, 누구보다도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아내의 입장에선, 이건 처음부터 안 되는 게임인 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일어서서 이마로 쏠린 머리칼을 넘기더니 뒤로 조금 물러섰다.
"이제 좀 사람 사는 곳 같군요."
"옷장이 왜 필요한데?" 내가 물었다.
"당연히 우리 짐을 넣어두려고요." 그녀는 내 질문을 못 알아듣는 척했다.
"우리가 영원히 여기 머물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내가 다시 물었다. ☞ 본 책, 25쪽     


어찌 되었거나 두 사람에겐 삶의 확연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서로 다르긴 했어도 나름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그렇게 살아가던 중 드디어 꿈을 실현할 기회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때 5시 급행열차가 동쪽에서 울부짖으며 달려와 끽 소리를 내며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서둘러 짐을 싸! 기차로 가야만 해." 나는 소리 질렀다.
"좀 씻지도 않고 가려고요?" 아내가 물었다.
나는 마당 펌프로 뛰어가서 얼굴에 묻은 얼룩을 닦아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방안을 쳐다보았다. 아내는 거울 앞에 앉아 빗질을 하고 있었다.
"서둘러!" 나는 또 소리를 질렀다.
"기차가 얼마나 정차할지 모르잖아!" ☞ 본 책, 27쪽     


아내는 여전히 느긋하기만 합니다. 언제 떠날지 몰라 가슴 졸이는 건 어디까지나 나일뿐입니다. 결국엔 기차를 놓치고 참다못해 아내에게 퍼부으려던 나는 순식간에 어린애 취급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당신은 곰스크로 가고 싶지 않지?"
"나도 당연히 곰스크로 가고 싶어요. 하지만 흥분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요? 어차피 우리는 당분간 여기 머물러야 해요…… (중략) ……"
"그래, 차라리 그러면 좋겠어!" 나는 터질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녀는 웃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아요." ☞ 본 책, 31~32쪽     


삶의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 자신에게 처해진 지금의 임무 따위는 잊고 언제든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몇몇 철부지 같은 남자들은 그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과연 그런 남자는 뭘 하고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아내가 아등바등 현실을 버텨나가는 동안-그러는 사이 아내가 늘 그렇게 말하듯, 방은 점점 더 '살 만하게' 바뀌었다. 그녀는 다락의 잡동사니 속에서 그림 몇 점을 찾아내 벽에 걸었다. 또한 낡긴 했으나 여러 번 문질러 닦은 양탄자 하나를 주인에게서 얻어냈고, 두 방의 천장과 벽을 사흘 내내 밝은 노란색으로 칠하기도 했으면, 창문에 새 커튼도 달았다. (본 책, 38쪽)- 그들은 어쩌면 소주잔이나 기울이면서 자기 혼자만 받는 것도 아닐 게 틀림없을 스트레스를 달래고 있지나 않았을까요?


철로처럼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면서 줄곧 살아온 두 사람, 그리고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그 길을 고집할지도 모를 부부라는 관계. 그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테다.
"나는 왜 당신이 무조건 곰스크로 가야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내가 소리쳤다.
"내 인생 전체는 언젠가 곰스크로 떠나는 꿈이었다고!" 아내는 침묵했다.
"당신은 고집 센 아이처럼 말하는군요." 그녀는 끝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인생이 의미를 가질지 아니면 망가질지는 오직 당신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왜 직시하지 않는 거죠?" ☞ 본 책, 56~57쪽     


누가 옳았고 반대로 누가 틀렸건 간에 삶에 있어 현실과 이상이라는 것은 양자가 다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다만 어느 한쪽만을 치중했을 때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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