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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04. 2023

세상에 꼿꼿이 서고 싶은 팽이처럼

005: 박영희의 『팽이는 서고 싶다』를 읽고……

시집의 속표지를 펼치자마자 제일 먼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어, 누구지? 분명히 어디선가 본 사람이었는데?"

에이, 설마 뭐 그럴라고, 하면서 저자의 이력을 보니 대구 화원교도소에서 7년을 복역한 데다 이 시집을 엮은 곳이 대구 서구 평리동이었습니다. 대구 바닥이 그다지 좁은 곳은 아니지만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이니 혹 한 번 어디선가 마주친 적-머리가 그다지 좋은 건 아니지만 웬만해선 한 번 마주친 사람은 거의 잊어버리지 않는 습성이 제게 있습니다-도 있는가 싶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이런 류의 시집들은 분명히 '금서'로 낙인찍혀 서점가에선 구경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동아리방 어딘가 구석에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어 있을, 혹은 '이 책 한 번 읽어 봐!'라는 말과 함께 쉬쉬하며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그런 책이 아니었을까요? 아직까지 이념의 허울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라 해도 그리 보면 요즘 세상 참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읽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밖으로 마구 들고 다녀도 눈총을 주는 사람 없고, 심지어는 이렇게 온라인상에 대놓고 리뷰까지 올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박영희 시인은, 책뒤표지에 쓴 최종수 신부의 글에서 왜 감옥에 가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한철 매미가 이레 동안 노래하기 위해 무려 일곱 해를 땅속에서 지내야 하듯 그는 일제치하 광부징용사를 쓰기 위해 월북을 감행, 그 대가로 일곱 해를 감옥살이해야 했다. ☞ 책 뒤표지, 최종수 신부의 글 中에서


무슨 지독한 이념 의식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국가에 대한 내란음모 의도도 아니었습니다. 이 말대로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그는 글을 쓰기 위해서 월북을 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런 그의 행동이 국가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이 되었을 테고요. 그에게 내려진 죄명은 '잠입탈출', 국가보안법이라는 서슬 퍼런 덫에 걸리고 만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는 수감생활에 대한 박영희 시인의 소회가 물씬 배어 있는 작품입니다.     


피고인,
피고인은 왜 자꾸만
북한을 조국이라고 하는 겁니까

판사가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그럼 금강산은 어느 나라 산입니까?
백두산은요?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우리나라 산이지요

이유는 그것입니다 ☞「최후진술」 전문, 본 책 42쪽     


아마도 이 최후진술에서 시인이 좀 더 완화된 발언을 했다-마치 갈릴레이처럼-면 형량을 감할 수 있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물러서질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7년의 형량을 고스란히 다 감내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고도 자신의 죄를 모르는 괘씸한 사람으로 비쳤을 테니까 말입니다. 전형적으로 우파의 성향을 가진 이들이 그를 본다면, 그는 영락없는 극좌파에 해당될는지도 모릅니다.


사나흘 귀휴도 시켜 줄 수 있고, 밖에 나가 오입도 시켜 줄 수 있으니 전향서 한 장만 쓰라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그럴 수만 있다면 남산 지하실에서 만들어진 간첩이 아닌 저들이 그토록 원했던, 아버지도 간나새끼 하며 없애버리는 진짜 간첩이었으면 좋겠다 ☞ 「전향서」 발췌 요약, 본 책 74~75쪽


이렇게 말할 정도로 그는 세상에 당당하고 꿋꿋하게 서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팽이처럼 말입니다. 그런 그는 세상을 돌아보고 세상의 불합리함을 노래할 줄 아는 시인이었습니다.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나 베풂,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갈망하고 있었지만 현실 생활은 그리 간단치 만은 않았습니다.     


순전히 노래 때문이었다 너희들의 노래는 모두 합해 스무 곡 정도에서 마침내 그 바닥을 드러냈지만 나의 노래는 서른 곡이 넘어가고 쉰 곡이 넘어가도 끄떡없었다 ……(중략)…… 그러면 너희들은 어떻게 그 많은 노래를 알고 있느냐며 부러워했던가 ……(중략)…… 그러나 나는 말해줄 수 없었다, 그 비밀을 온종일 라디오를 틀어놓고 일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노래에 관하여」中에서, 본 책 36~37쪽     


몇십 곡씩의 노래를 거뜬히 뽑아내는 게 노래에 소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들은 열심히 일하는 데 노래만 들으며 시간을 소일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온종일 라디오를 틀어놓고 일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걸 말해 준다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시인이었습니다. 원래부터 제 배 부르면 종 배 고픈 줄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저렇게 넓은 집에서 어떻게 시가 나올까 / 저렇게 윤기 나는 밥상에서 어떻게 소말리아가 보일까 / 저렇게 멋진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어떻게 실직자들이 보일까 ☞「중심」中에서, 본 책 14쪽


하지만, 현실과 이상과 별개라고 누가 그랬을까요? 감옥에서 나와 일상으로 돌아온 그를 반기는 건 낯섦, 부끄러움, 어색함 등 온갖 긍정적이지 못한 형용사들 뿐이었다고 합니다.  


일곱 해 만에 돌아온 셋방,
아내는 밥상을 차린다
숟가락이 놓이고
젓가락이 놓이고
……(중략)……
낳은 지 다섯 달 만에 헤어져
어느새 여덟 살이 되어버린 딸아이는 애비를
기억조차 없는 시선으로 힐끔힐끔 훔쳐보고
먹어도 되는 것인가, 이 쌀밥을
유리창에 비치는 아침햇살이 눈물겹다 ☞「가석방자의 노래 1」中에서, 본 책 94~95쪽     


구체적으로 이런 상황을 짐작하기 쉽지 않지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인해 받은 대가, 그리고 그 대가로 인해 함께 삶의 고통을 묵묵히 나눠졌어야 할 박영희 시인의 아내의 모습이 눈물겹게 그려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그 아내에게 사랑과, 미안함과, 감사함을 피죤 두 방울로 표현한 주옥같은 시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해 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 일으켜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중략)……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죤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내의 브래지어」中에서, 본 책 34~35쪽     


하필이면 그때 혼자서 빨래를 개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문득 한쪽에 밀쳐 놓은 아내의 브래지어가 보였습니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 일으켜 세우고자 애썼을……,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아내이기에 좀처럼 세상 앞에 당당히 일어서지 못하는 대신에 가슴이라도 세웠어야 할 아내의 그 마음고생의 흔적이 엿보였다고나 할까요? 너덜너덜 보풀이 일어난 브래지어, 어느샌가 그렇게도 탄성이 좋았던 와이어는 서서히 휘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살이가 이렇게도 힘들다는 것을 왜 좀 더 일찍 알지 못했을까요?

     

시집을 읽고 있는 제가 이 정도였는데 과연 박영희 시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하니 그가 부어 내린 그 피죤 두 방울이 그저 피죤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분명 그것은 그가 말한 것처럼 아내에게 전하고 싶은 향기, 그것도 미안함을 가득 담은 마음의 향기였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박영희 시인의 생의 제일 큰 목표인 듯 보이는 시 한 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아마도 이 시는 박영희 시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바람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내 바람 크지 않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식후에 피우는 한 개비 담배만큼만
세상이
살맛 났으면 좋겠네 ☞「작은 바람」 전문, 본 책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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