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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05. 2023

당편이 그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006: 이문열의 『아가』를 읽고……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이문열 작가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을 세상에 내놓았고, 쓰는 족족 이슈를 불러일으키는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들은 너무도 현학적인 그의 작품 스타일에 반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주는 매력은 크다 못해 사뭇 치명적으로까지 다가오곤 합니다.     

10년도 훨씬 전에 읽게 된 그의 소설,『사람의 아들』이 주는 충격은 정말이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1979년 "오늘의 작가상"의 영예를 안겨 준 그의 작품을 보면서, 과연 이문열은 어떤 정신세계를 갖고 있을까 궁금했었습니다.     


예수와 아하스페르츠가 만난 것은 다섯 번이나 되는데 그 첫 번째는 광야에서였다. 아하스 페르츠는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임을 내세우는 예수에게 세 가지 시험을 한다. 허약한 육체와 영혼으로 고통받고 방황하는 인간을 위해 빵과 기적과 권세를 요청하였으나 예수는 그 요청을 거부하고 아하스 페르츠를 사탄으로 규정하며 물리친다. 이에 아하스 페르츠는 그가 약속한 구원의 허구성을 보고 그를 거부하기로 결심한다.
그 뒤 만남을 거듭하면서 아하스 페르츠는 한편으로는 예수를 설득하고 한편으로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진행시킨다. 그리고 예수가 인간적인 구원을 기어이 거부하자 로마의 힘을 빌려 그를 처형하고 만다. 하지만 예수의 재림이 걱정되어 죽지 못하고 끊임없이 세상을 배회하며 감시하는 역을 맡게 된다. ☞ 출처 : http://www.yes24.com/24/goods/1392485?scode=032&OzSrank=1, 책소개 줄거리 중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적지 않은 반감과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최고의 작품, 어느새 이 시대의 고전의 반열에 능히 오를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 작품을 읽은 지 한참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작품,『아가』역시 그의 역량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아가』는 지금은 쉽게 볼 수 없지만 옛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어느 반푼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시골 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란 이들이 오랜만에 동창회 모임을 가지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하나의 물음을 제기합니다.

     

「맞다, 당편이는 참 어예 됐노?」☞ 본 책, 11쪽


어린 시절 그들의 입담에 끝없이 오르내리던 당편이, 나중에 각자가 성장해서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게 되었을 때에도 고향 한 자락을 지키며 꿋꿋이 살아가던 당편이를 추억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엄밀히 따지면 여기의 모든 이야기는 한 인물에 대한 과거 회상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당편이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더라는 카프카의『변신』속의 그레고르 잠자처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기관이나 정신을 지니지 않은 채로 홀연히 그 마을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지주였던 녹동 어른 댁의 대문간에 버려진 채로 발견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인심이 후한 녹동 어른은 당편이를 거둬들이게 됩니다.


「어예기는 어예? 하마 내 품에 날아든 새를. 당편이는 우리 식구라. 그러이 여러 소리 말고 낑가조라(끼워주라). 너들하고 한 쌈에 여주라(넣어주라), 이 말이따. 타고난 게 들쭉날쭉해도 이래저래 빈줄랴(맞춰) 어울래 사는 게 사람이라.」☞ 본 책, 28쪽     


해방이라는,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굴레를 지나오면서 그렇게 모자라고 반편이었던 그녀에게 일어났던 갖가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작품 전반에 걸쳐 소개되고 있습니다. 자세한 줄거리는 혹시라도 이 책을 읽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생략하고, 전 여기에서 당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당편이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길을 가다가도 만나면 손가락질하거나 간혹 비웃기도 할 것이고, 행여 마주치거나 혹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느낌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별은 여성이지만, 전혀 여성의 매력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얘기입니다. 사람의 구실이라고는 어느 것 하나 할 수 없었던, 심지어는 걸음걸이조차도 '기우뚱 철퍼덕'이라고 묘사될 만큼 요란하게 걸을 수밖에 없는 신체 구조를 가진 데다, 정갈하게 차려 놓고 때론 맛을 음미하며 들어야 하는 식사도 불편한 수족 이동 반경으로 인해 온갖 음식들을 마구 버무린 일명 '당편이 밥죽'으로 때워야 하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조금도 비관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런 것조차도 투정하거나 비관하지 못할 만큼 사람이 모자라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순수함 그 자체인 사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작품 속 곳곳에서 당편이의 존재는 독특하다 못해 빛나기까지 합니다.


높임말이라고는 쓸 줄 몰랐던 그녀, 나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그녀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하대했던 그녀, 하지만 그런 막 되어 먹은 그녀를 동네 사람들은 따뜻이 감싸주었습니다. 그 넉넉한 인심이 우리 삶의 전반을 지배했었던 한 시대가 있었다는 걸 꼭 기억하고 싶습니다. 물질보다도 명예보다도 사람이 우선이었던 시절, 그땐 다소 평균적인 사람에 못 미치는 이가 있더라도 녹동어른을 비롯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러했듯, 다 거둬 입히고 먹이고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원초적인 미약함과 모자람에 동조하진 못했을지라도 기꺼이 그들의 삶의 한 편에 끼워 넣어 줬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사람들의 후한 인심은, 반편이었지만 함께 살아갈 때는 당편이 역시 온편으로(온전하게) 인식될 그런 세상이 있었다는 것이겠습니다.     


삶의 변화나, 역사의 변화는 한 개인에게 때론 비운을 몰고 오기도 합니다. 그녀를 아무런 조건 없이 거둬 주었던 녹동어른이 죽고 나서 그녀의 삶에도 일대 바람이 불 기미가 보였지만, 녹동어른이 몸소 보여준 아량을 마을 사람들은 잊지 않습니다. 상 차린 김에 밥 숟가락 하나 더 얹어 그녀를 먹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남아도는 옷가지들로 그녀의 추위와 궁핍함을 면하게도 해 주었습니다.     


한 고향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이 모임을 하다 말고, 이제 와서 누구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인간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당편이를 왜 굳이 찾았을까요? 그저 그것은 단순히 한 고향 사람으로 기억되는 누군가가 궁금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태곳적 인간의 본질에 다름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편이, 그녀는 어린아이의 지능을 갖고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한 인간의 생애에서도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점점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경향을 갖는 법입니다. 사회화가 덜 된, 아직 그 인생조차도 여물지 않은 어린아이의 존재가 지극히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는 사실은 우리가 한 번쯤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온전한 한 사회인으로 성장해서 자신의 삶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사회에 기여하면서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최상의 가치로 여깁니다. 어딘가 한 구석이 지극히 모자라고 저렇게 살 바에야 짐승으로 사는 게 더 낫다고 여겨질 만한 그런 존재조차도 보듬어 안고 살아갈 수 있었던 우리의 지난날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작가 이문열은, 늘 사족처럼 그의 글 속에 자신의 생각을 두드러지게 담아내는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모습들이 수많은 문청들의, 혹은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지 않은 영향력을 끼쳐 왔고, 아마도 가장 사랑받는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반열에도 오르게 했을 것입니다. 물론 때론 그의 지나친 개입이 눈에 거슬리기도 합니다. 작가의 개인적인 신념을 너무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는데, 『사람의 아들』은 기독교인들로부터, 『선택』은 수많은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현학적인 태도와, 인간의 무능함을 꼬집다 못해 인간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 지극히 염세적인 생각들을 표출해 온 탓에 그가 사랑받는 만큼 어쩌면 대중들에게 미움을 받는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작가는 작품으로 승부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좋으면 그 작가는 작품 속에서 우리들의 뇌리 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법입니다.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양산하고 시대의 화두를 예민하게 건드려 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게 했던 그는, 분명 위대한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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