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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Oct 02. 2023

역사 소설의 전형

003: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을 읽고……

고등학교 때 반에 공부를 좀 못하는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국사 시험에 이런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삼국 통일이 일본과 중국 등 주변 국가들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50자 내외로 기술하시오!"     

그 친구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렇게 썼다고 했습니다.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선생님께서는 영 틀린 말도 아니니, 확 그어버릴 수도 없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5점짜리 배점에서 무려 3점이라는 부분 점수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시험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그 친구를 선생님께서 면박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자식이! 뭘 좀 제대로 알아야지, 말이야!"     


십자군 이야기하면, 중세 유럽을 가르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쯤, 그리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 전쟁이었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어디까지나 제가 아는 것이 그 정도까지였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위 사건 속의 그 친구처럼 저 역시 너무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단 걸 증명하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십자군 전쟁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사실상 지극히 미미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봤자, 명분이 어떠했든 간에 두 종교 간의 다툼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모른다고 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런 지장을 느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한 사건의 발단에서 전개, 그리고 결말과 그에 따른 영향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책, 『십자군 이야기 1』은 충분히 그 역할을 감당하고도 남을 만하다고 봅니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로마인 이야기』로 무려 15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을 수 차례 드나들며, 심지어는 목이 빠져라 책에 파묻혀 밤을 지새우게 했던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또 한 번 저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40년 넘게 체류하면서 독학으로 로마사를 연구했다는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역사현장을 직접 다니고 취재하여, 기존의 사료 해석을 뛰어넘을 만큼 도전적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물론 소설 못지않은 뛰어난 구성력으로, 수많은 대중들에게 역사도 충분히 재미있고 유익한 분야라는 것을 널리 인식하게 해 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펴낸『십자군 이야기 1』은,『로마인 이야기』에서처럼 다시 한번 독자들을 사로잡을 거라는 당연한 예견을 하게 해 주었고, 아니나 다를까, 책을 펴 듦과 동시에 마치 책 속에 빨려드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먼저, 배경 지식이 모자란 관계로 십자군 전쟁에 대해 간략하게 더듬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십자군은 교황의 호소로 조직된 기독교적인 성향을 강하게 띤 군대를 의미하는데,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감행-제1차 십자군 원정은 1096년에 시작되어 1099년에 끝난다-된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해진 대규모의 군사 원정을 가리킨다. 당시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십자군은 의로운 군대로 이 전투는 성전이 되지만, 실제로는 이슬람 세계의 여러 나라들뿐만 아니라 같은 기독교 문화권이었던 동방정교회의 나라들까지 공격해 들어간 침략군이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 출처 :위키백과 "십자군" 中에서 발췌 요약  


바로 이 십자군 원정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이루어진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얽힌 이야기들, 즉 십자군 원정 1세대의 이야기가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이 책에서 소개한 십자군 원정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얘기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십자군 원정은 예루살렘과 그리스도의 성묘를 이슬람교도의 지배로부터 탈환한다는 명분에서 시작된, 유럽인들-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교도 유럽인들-이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벌인 수 차례에 걸친 군사 원정을 말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원정대들은 약탈이나 학살이 주목적이 아닌 어디까지나 성지 회복을 위한 불가피한 전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맞상대가 되어야 했던 이슬람 세력들은 그런 허울 좋은 명분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십자군이 종교를 기치로 내건 군대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한동안은 늘 그렇듯이 비잔틴제국(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약 1,000년 동안 존속했던 동로마 제국)이 고용한 용병부대라고만 생각했다. ……(중략)…… 투르크 인들이 용감하게 싸운 것도 상대가 그리스도교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지를 빼앗으러 온 침략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본 책, 108~109쪽 


전쟁이란 어느 한쪽이 강화를 요청하는 식으로 무력 충돌을 피하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지 회복이란 허울 좋은 명분이 있었어도 그건 엄연히 침략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을 테니 원정을 떠남과 동시에 전쟁은 성립되는 셈이 됩니다. 아마도 이 원정의 배경엔 그리스도교도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하나의 성경 말씀이 작용했는지도 모릅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중략) ……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 출처 : 갈라디아서 4장 22~31절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저는 개인적으로 불신자이지만 이렇게 지칭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이 세운 두 가지 언약에 대해서, 그리고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에 대해서 이야기한 부분입니다. 즉, 계집종인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은 비록 아브라함의 장자이긴 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믿음의 결과로써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은 로마서 9장 8절의 말씀-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대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이란 얘기입니다. 바로 이 이삭에게선 그리스도교도들이, 이스마엘에게선 이슬람교도들이 갈라져 나오게-그의 후손 중에 마호메트가 나왔다- 되었습니다. 그리 보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뿌리가 같은 셈이 됩니다.


장자는 아니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언약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이삭의 후손들인 그리스도교들이 성지로 삼아야 할 베들레헴이나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들의 손아귀에 있으니 그들로서는 원정의 확실한 대의명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단한 행군의 과정도, 식량이 모자라 약탈을 일삼고 이교도의 백성들을 대량 학살하는 현장에서도 아마도 그들은 모종의 자부심이 있지 않았을까요?

     

병사들의 배후에는‘성십자가’를 받쳐든 예루살렘 대주교가 따랐다. 병사들로서는 그리스도가 책형에 처해진 십자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 본 책, 248쪽      


그런 집단 최면적 증상에 걸린 수천에서 수만의 원정대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수많은 도시들을 거치는 동안 그들의 활약상은 서유럽 세계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성도 예루살렘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지만 서유럽이 모두 들고일어나 출발한 그리스도교도 군대가 그들의 성지인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가 받은 충격은 컸다. ☞ 본 책, 117쪽     


하지만 막상 이슬람교도들과 맞닥뜨렸을 때 이 원정을 대하는 두 세력들 간의 생각들은 서로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가 안티오키아(현재의 터키 남쪽, 시리아 국경 부근의 도시)까지 온 것은 다름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 (중략) …… 우리는 패자에게도 관용을 베풀 용의가 있다. 이슬람의 법에 복종하기로 한 자는 용서하라고, 만약 이를 거부한다면 안티오키아 탈환은 칼로만 이루어질 것이니 각오하라. ☞ 본 책, 174~175쪽     


어찌 되었거나 이슬람 세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숫적 열세이던 그리스도교도들은 드디어 예루살렘 입성을 목전에 둔 순간에, 자신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온 것이라는 집단 최면에 또 한 번 빠져들게 됩니다. 명분 없는 전쟁이 그들만이 인정하는 명분을 갖추게 된 셈이지요.


모두가 감동에 몸을 떨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 (중략) ……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는 감회가 모든 이의 가슴 가득 차오르고 흘러넘치는 것을 감미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순간 제1차 십자군의 전사들은 온전히 겸허한 순례자가 되었다. ☞ 본 책, 221쪽     


역사적으로 숱하게 일어났던 전쟁들 중에서 가장 극악무도하고 사상자가 많은 전쟁은 다름 아닌 종교 갈등으로 빚어진 전쟁이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국가 간의 전쟁은 사상자가 많다는 것은 매일반이겠지만 서민들의 입장에선 단지 자신들을 지배하는 사람 혹은 계층이 바뀐다는 것뿐이지 근본적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에선 별 변화를 느낄 수 없기에 어느 정도 선에서 전쟁이 마무리되곤 합니다. 그러나 종교 전쟁은 인간의 믿음과 근본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들과의 전쟁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다른 전쟁들보다 훨씬 잔인하고 또 오래 지속된다는 게 특성이라고 합니다.     


종교 전쟁에 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특정한 신을 마음속에 모셔 두고 끝없이 싸운다. 조금의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약탈하고 학살을 일삼는다. 오직 신을 위해서다. 자신들이 원해서 하게 된 전쟁이 아니라 신이 바라시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24쪽) 불가피하게 벌이게 된 전쟁이다. 그렇게도 신이 바라시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났던 이들도, 결국엔 인간의 계산이 들어서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본연의 자세가 흐트러지게 된다.
십자군 운동은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는 달리 점차 정치적·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면서 순수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교황은 교황권 강화를, 영주들은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등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성향이 반영된 전쟁이었는데……. ☞ 출처 :위키백과 "십자군" 항목 中에서 발췌 요약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십자군 원정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태생적으로 인간은 선하지도 혹은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겠습니다. 좋든 싫든 우린 여기에서 이 사실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을 듯합니다.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한 인간 안에‘선’과‘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 본 책,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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