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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Oct 17. 2023

여행 후 이별 (part. 4)

백열 네 번째 글:  저의 리즈 시절 이야기입니다.

저를 찾아왔던 그녀가 다방입구에서 현주를 마주치자마자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었습니다. 원래부터 네가 그런 애란 건 짐작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친구의 애인을 뺏냐고, 너네들 언제까지 가는지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당장이라도 머리를 쥐어뜯을 듯 현주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전 두 사람을 말려야 했습니다.

우린 둘 다 그녀에게서 욕을 한 바가지 듣고 나서야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욕이 아니라 뺨을 맞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미영이에게서 오는 모든 메시지는 그날을 기점으로  뚝, 끊어졌습니다. 그때 이후 다시 대구로 돌아오기 전까지 대략 한 달 정도 남았던 때였는데, 미영이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나중에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속이 후련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부터 현주와 제겐 걸리적거릴 게 없었습니다. 일단 일일이 만날 때마다 교회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게다가 누구보다도 엄마가 너무 좋아했습니다. 가장 좋았던 것은, 뭘 하든 좋을 때는 바로 좋다 말하고, 싫은 것은 조금도 참지 못하는 화끈한 성격에 제가 잔머리를 굴리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솔직히 현주와 공식적으로 사귀게 된 이후의 일 중 헤어지기 며칠 전까지의 일은 전혀 기억에 없습니다.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별 것 없는 일상의 반복이라서 그런가 싶긴 한데, 돌이켜 보면 이별을 앞둔 며칠에 대한 기억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그때의 우리는 여느 연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만남을 가졌습니다. 평상시엔 현주가 다니던 미용실 앞에서 일이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잠시 만나 데이트를 했습니다. 그러다 현주가 쉬는 날이면 제가 다니던 학교에 와서 강의가 마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현주와 전 질리도록 걸어 다녔습니다. 어디에서 만나든 우린 걸었습니다. 하루에 1시간 걷기는 기본이었고, 가끔 동성로에서 만날 때는 2시간 가까이 걷곤 했습니다. 현주는 한창 일하느라 차를 살 형편이 안 되었고, 저 역시 집에서 '대학생이 무슨 차가 필요하냐'라는 말에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현주는 고모와 같이 살던 집으로 저를 불렀습니다. 현주의 고모와 저는, 오며 가며 아파트 입구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아직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전 고모에게 저를 소개하는 자리구나 하며 갔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집엔 현주 혼자 뿐이었습니다. 마침 고모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니, 마음 편하게 있으라고 했습니다. 대뜸 현주는 저와 술을 한 잔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때도 전 지금처럼 술을 못 먹던 때라 병맥주를 사 와 절반을 겨우 마셨고, 현주는 소주 5병과 제가 남긴 술까지 마셨습니다. 아마 11시가 다 되었을 겁니다. 현주도 술에 취했고 저도 가야 해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현주는 너무 늦었다고, 자기는 괜찮다고 하면서 자고 가라며 저를 붙들었습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듯 그때만 해도 전 일종의 혼전순결에 집착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제 사전에 외박은, 그것도 여자와의 외박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끔 영화를 보다가 이상야릇한 장면이 나오면 현주는 서슴없이 그렇게 묻곤 했습니다.

"너, 저거 안 해봤지?"

"응. 왜?"

"스무 살이 되도록 저것도 안 해보고 그동안 넌 뭐 했냐?"

"그러는 넌, 해봤어?"

"당연하지!"

"몇 명이나?"

"글쎄, 한 대여섯 명쯤?"

현주의 가장 큰 장점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제가 그 점에 반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넌 그럼 언제 할 거야?"

"글쎄, 난 모두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치른 그날 할 생각이야."

"뭐야, 도대체? 넌 어디 조선시대에서 왔어? 그러면 우리가 한 번 하려면 무조건 결혼부터 해야겠네?"

"응."

역시 꽤 도발적인 질문을 했지만, 저 역시 절대 양보는 없었습니다. 가끔 친구와 옛날이야기를 하다 현주 이야기가 나오면, 그때 제가 너무 멍청했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현주에게서 삐삐가 왔습니다. 술에 취해 잠이 들었을 법도 한데, 그때까지 안 자고 있던 현주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우리 이번 주 울산으로 여행 가자. 물론 당일치기로."

1박 2일로 가자고 하면 씨도 안 먹힐 것 같으니 아예 당일치기라고 현주는 못을 박습니다. 그렇게 하자고 전화를 끊은 뒤 현주에게선 일요일이 될 때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TV와 라디오에서 원미연의 "이별여행"이 그렇게 많이  흘러나오는데도 삐삐조차 치지 않았습니다. 전 그냥 괜히 고모가 없는 틈을 타 몰래 저를 집에 부른 것 때문에 고모에게 된통 혼이 나, 며칠 동안 저를 못 만나게 한 건가 싶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 여행이 무척 설레었습니다. 현주와는 처음으로 가는 여행이기도 했지만, 저에게는 주머니 속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 마련한 반지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작정이었습니다. 어디 분위기 좋은 데 가서 노래는 못 불러줘도 무릎을 꿇고 꼭 그 예쁜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나름 꿈에 부풀어 일요일 7시가 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일요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현주와 만나기로 한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나갔습니다. 약속은 아침 7시였지만, 6시 30분이 채 되기 전에 도착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현주를 기다렸습니다. 누군가는 일찍 가서 뭘 하느냐고 하겠지만, 그 30분의 설렘과 기다림이 저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잘 알기에 늘 약속시간보다 최소 30분은 더 일찍 도착하곤 했습니다.


정확히 5분 정도 남았을 때 현주가 길 건너 신호등 앞에 서 있는 걸 봤습니다. 뭐랄까요? 평소의 현주와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현주는 주로 노출이 좀 있는 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신체 일부를 훔쳐보든 말든 신경도 안 썼으니까요. 그러던 현주가 거의 정장에 가까운 차림으로 나타난 겁니다.

전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있구나, 하며 생각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그러던 순간에도 전 주머니에 든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현주가 신호등을 건너 성큼성큼 걸어서 제 앞에 와 섰습니다. 맞습니다. 어딘가 확실히 달라진 곳이 있었습니다. 나중에야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버스정류장에 나온 건 제가 알던 현주가 아니라 빈 껍데기뿐인 현주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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