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마해송의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읽고……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로 알려진 마해송의 『바위나리와 아기별』은 짤막하지만, 정성 들여 그려진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스토리 전개가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그런 얘기였습니다. 마치 어느 지방에 몇 천 년을 묵어 왔던, 그래서 사람들 입에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에~'하며 그때를 그려보게끔 하는 그런 전설 같은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작품집 속에 포함된 많은 단편들 중에 단연 먼저 떠올려야 하는 작품은 「바위나리와 아기별」입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는, 그래서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도 다 받아줄 수 있는 그런 존재를 늘 갈구해 왔던 바위나리와, 어느 날 바위나리의 절규를 듣고 홀연히 나타나 바위나리의 아름다움을 인정해 주고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으로 받아 준 아기별, 이 둘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내용이라고 보면 됩니다. 바로 이 둘의 모습을 보면, 진정한 친구라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일까, 하는 점을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생명이 소진할 때까지 아기별만 애타게 기다리다 결국은 시들어 죽음을 맞이하고, 하늘로부터 천벌을 받아 빛을 잃어버린 채 깊고 깊은 바닷속으로 추락해 버린 아기별, 죽어서야 서로 다시 만나게 된 그들의 모습에서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떡배 단배」는 이보다는 조금 더 긴 이야기이지만,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 채 읽을 수 있었던 얘기였습니다. 이 작품을 발표한 1948년은 우리나라에 미군정이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을 때였는데, 우리나라가 미국에 유상 혹은 무상의 원조를 받아 종속 상태가 심화되어 가는 모습을 실감 나게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다 보면, 어쩌면 미국의 입장에서 어떤 점을 노리고 우리나라에 무상 원조를 시행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왜 우리가 조금도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의 손아귀 안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일 만큼 이해되는 그런 얘기라고나 할까요?
문명의 혜택-그것이 결국은 단배(선박)가 제공하는 단 것과, 떡배가 제공하는 떡이었습니다-을 급작스럽게 누리게 된 섬사람들, 그 섬사람들을 찾아든 갑동이와 돌쇠. 갑동이는 줏대가 없어 단배의 괴수가 되지만 돌쇠는 일찍이 단배와 떡배의 실체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자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갑니다. 당장엔 달콤한 먹거리를 제공해 주는 단배에 가기 위해 자신의 생계 수단인 짚단과 수수깡을 맹목적으로 단배에 갖다 바치는 섬사람들, 뒤 이어 섬에 정박한 떡배에 가기 위해 (짚단과 수수깡을 갖다 준 대가로 바꾸어 온 단 것을) 떡배에 갖다 바치고…….
어느새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점령해 버리고 노동의 가치를 잊어버리게 하며 그저 쾌락에만 젖게 하는 떡배와 단배는, 어쩌면 우리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마저도 잃어버리게 만들어 마침내는 기계의 한 부품으로 살아가도록 만든 물질만능주의와 극단적인 쾌락주의를 꼬집어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이 작품들을 창작한 연대를 참고한다면, 이만한 상상력이, 그리고 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이리도 훌륭하게 상징성을 띤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그저 대단하다는 말밖엔 달리 평할 길이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읽어도 충분히 이야기의 흡인력이 요즘의 것에 뒤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떡배 단배」는 아이들이 읽을 때 어른이 적절한 지도를 해 준다면 이 작품으로부터 더 많은 걸 얻게 되지 않을까 싶지만, 행여 쓸데없는 사족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도 드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