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차동엽의 『잊혀진 질문』을 읽고……
고등학교 다닐 때 기말고사 기간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전 과목 시험에서 과목 당 1~2개 정도 틀렸으니 제 딴에야 꽤 잘했다고 으스댈 법하지 않을까 싶어 생각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누군가가 제게 몇 개 틀렸냐고, 시험은 잘 봤냐고 물어봐 주길 바랐었습니다. 사실 이전 성적에 비하면 분명 잘 친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때 한 녀석이 혼자서 계속 구시렁대고 있었습니다. 원래 이 놈, 공부 꽤나 잘하는 놈인데 모르긴 몰라도 이번 시험은 망친 모양이구나 싶어 위로나 해 줄까 싶어 몇 마디 건넸습니다.
“이번 시험 망쳤구나! 괜찮아, 다음에 잘 치면 되잖아?”
녀석은 곁눈질로 째려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딴 시험에서 틀릴 게 뭐 있다고. 정말 짜증 나서 죽겠어!”
꼭 눈치 없는 애가 몇 명씩 있는데, 아마도 그중에 저 역시 포함되었던 모양입니다.
“이번에 수학이 좀 어려웠어. 뭐, 그럴 수도 있지! 몇 개나 틀렸길래 그래?”
“국어 2개, 영어 1개, 수학 1개, 영어와 수학은 다 맞혀야 했는데 말이야.”
배불러 터진 소리에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한 대씩 쥐어박히는 걸로 얘기는 끝났지만, 어쩐지 이 책, 『잊혀진 질문』을 읽으면서 왜 하필 그때의 일이 생각났을까요?
모든 현상은 각자가 처해진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비칠 수밖에 없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닙니다. 나름의 유용했던 측면도 있었고, 신부님이라는 특이한 직업(?)에서 오는 그들의 사유 방식이 못내 궁금해서 책을 펼쳐 읽게 되기도 했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책의 제목이 “잊혀진 질문”일까, 하고 말입니다.
이 책 속에 담긴 질문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이 어떤 신부님에게 남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차동엽 신부가 대신해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무리 종교를 탈피해서 인생 전반에 대한 사색과 그 살아가는 방법과 사유 방식을 설명해 준다고 하지만, 종교적인 색채를 띠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역시나 신부라는 직업을 가진 저자답게 여기저기에서 가톨릭 교리를 바탕으로 한 그의 사유의 흔적들이 엿보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종교를 가지지 못한 저에게 가톨릭적인 냄새가 거슬린 건 아닙니다. 정말 심기를 건드렸던 이런 질문을 애초에 품게 된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이라는 것이겠습니다.
한 번 태어난 인생, 왜 이렇게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가슴속에 분노가 가득한데 이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왜 자기 인생에 쉽게 만족하지 못할까?
악한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례는 대체 뭔가?
우리나라는 종교가 번창한데 사회 문제는 왜 그렇게 많나?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대체 어디에 숨어 있나?
내가 사는 이유를 찾을 방법이 있을까?
악인의 길과 선인의 길은 미리 정해져 있나?
다 용서하면 행복해진다고? ,
천국과 지옥이 우리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좌절의 순간 출구는 어디에 있나?
꿈을 향해 달려가지만, 꿈은 자꾸 도망가고 이를 어찌해야 하나?
대략 몇 가지만 적어 보았습니다. 이런 질문을 한 걸 보면 아무리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최대의 재벌이라고 해도 그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우린 주의해야 합니다. 그와 우린 엄연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입니다. 다만 이 책이 의의가 있다면, 부와 명예와 지위를 한꺼번에 얻은 그가 일평생 가슴속에 묻어 놓고 살아온 질문들이라는 것이겠습니다.
이런 물음들을 보면서 감히 저 같은 서민 입장에선 올려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도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는 자조적인 웃음이 배어 나왔습니다. 단언하건대 지금의 저는 절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확실히 알고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생활에 쫓기면서 어쩐지 이런 질문은 해선 안 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오랜동안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주변에서 가장 여유 있게 살아가는 축에 속하는-경제적으로는 결코 그럴 수 없지만- 저마저도 그런 지경인데, 정말 하루하루를 훨씬 긴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떠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이 사회 어딘가에서 거의 굶어 죽어가다시피 하는 사람들, 최저생계비에 겨우 턱걸이할 정도의 돈을 받는 것도 모자라 법망을 교묘히 피해 가며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 불만을 내비치면 언제라도 강제 추방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온갖 피해를 당하면서도 입 한 번 떼지 못하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 밑천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밖에 없어서 몸을 팔고 웃음을 팔고 살 수밖에 없는 얼굴 모르는 수많은 여인네들……. 그런 이들에게 고 이병철 회장이 내던진 질문-아무리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라고 해도-은 해선 안 될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시선이 삐딱하게 느껴져도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던진 질문은 어쩌면 삶을 기만하는 질문이고, 인간을 조롱하는 질문인 듯 보인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듭니다.
인간이라는 것, 구원이라는 것, 빈자와 부자의 차이라는 것, 꿈이라는 것, 그리고 삶에 대한 만족감이라는 것 등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진 않습니다. 물론 행복이라는 것이, 그리고 삶의 종국에 끝내 미소 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돈’은 아니지만, 적어도 ‘돈’이 가장 큰 의미와 목적이 되는 우리나라에서라면, 제가 보기에 그가 던진 물음들은 그냥 배부른 소리였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점을 어필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이런 사람도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과 똑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삶의 목적과 인간 존재의 가치와 이유 등등의 원론적인 문제들은 생존이 보장되고 나서의 차후 문제에 속할지도 모릅니다. 호사스러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인간다운 삶의 질이 보장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은 과연 어떻게 비칠까요?
인생에 대한 많은 생각들, 종교를 대하는 편협되지 않은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어찌 보면 퍽 소중한 책일 법 하지만-그렇다고 해서 책이 별로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겐 사실 그저 자기 계발서로만 자꾸 읽혔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적당한 정도의 “인생 살아가기” 방식을 가르쳐 주려는 의도에, 종교적인 색채를 조금 가미한 그런 자기 계발서 말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굳이 한 번 읽어 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