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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Oct 29. 2023

결혼과 졸혼

백 마흔네 번째 글: 결혼하셨다면 만족하신가요?

대략 일주일 정도 지나면 저의 결혼기념일입니다. 지지고 볶고 살아온 그 무지막지했던 세월이 벌써 22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살아오고 말았네요.

"내가 니 때문에 산다 아이가."

9년 전에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께서 툭하면 제게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저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그런 어머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것도 공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들-게다가 경상도 상남자라는 조건은 더 최악이었겠습니다만-의 입장에서 그런 생각만 줄곧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럴 거면 왜 결혼했지?
지금이라도 후회가 막심하면 갈라서면 되는 거 아닌가?


당연히 인생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없던 시절이었고, 좋든 싫든 남편이라는 존재가 두부 자르듯 그렇게 쉽게 잘라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것도 알 리가 없던 때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은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직장을 다니며 언제든 호기롭게 던질 사표를, 요즘 직장인들은 늘 품속에 넣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게 하나 있습니다. 언제든 출력만 해서 제출하기만 하면 되는 것 말입니다. 바로 졸혼 선언문(?)입니다.


이 문서를 작성한 지는 벌써 십 년도 넘었습니다. 언제 내밀까, 하며 망설이고 망설이다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였고, 과연 이걸 내밀면 그 후폭풍은 또 얼마나 거셀까, 하는 염려에 지금도 고스란히 컴퓨터 하드디스크 안에서 잠자고 있는 상태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사랑하지 않은 사람과 어쩔 수 없이 결혼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은 죽고 못 사니까 결혼을 하게 된 거고, 데이트가 끝나고 집에 바래다줄 때마다 평생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에 결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펼쳐지는 현실은 우리의 그런 사탕발림의 허황된 꿈이 도저히 커버할 수 없는 정도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뼈저리게 느끼곤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 없이 산다는 것이 저의 자존감을 얼마나 갉아먹는지, 또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꾸만 추락하는 이 자존감 때문에 곤란을 겪은 게 얼마나 많았는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어쨌거나 결혼기념일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저희 집에선 결혼기념일을 저만 축하합니다. 결혼 첫 해를 제외하고 그 이후로, 저의 집사람은 저에게 단 한 번도 결혼기념일이라며 선물이랍시고 뭔가를 내민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저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마저도 그냥 넘어가는 건 '우리의 결혼이 완벽한 실패 작품'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마는 셈이니, 그것이 값이 나가는 것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저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선물을 내밀었습니다.


아마 올해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결혼기념일을 맞이하게 될 것 같습니다. 슬쩍 그런 생각이 드네요. 올해는 저도 미친 척하고 그냥 넘어가 볼까, 하고 말입니다.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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